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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S Culture _ 유라시아의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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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지중해지역원 Hit 7,233 Hits Date 19-06-0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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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지중해


김정하(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I. Eurasia의 ‘열린 바다’ 지중해


오늘날 유럽의 지중해에 대한 연구동향은 이 바다를 지리-정치적인 단위와 역사-문화적 단위로 구할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전자의 의미에서 지중해는 ‘닫힌 바다’이지만 후자의 역사-문화적인 차원에서는 열린 바다이다. 관점에 따라 상반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원하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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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유럽의 지중해와 유라시아의 지중해 


닫힌 바다로서의 지중해는 유럽-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한다. 유럽은 이 바다에서 독재와 전제정치에 굴복하지 않고 고대 그리스의 민중정치를 지켜냈다. 비유럽권 민족들의 핍박과 탄압에 저항하면서 민족적 순수성을 유지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지 않았고 기독교 사회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였다. 언어적으로도 유럽은 라틴어의 뿌리와 공동의 언어에서 파생된 세속언어의 문화를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경제의 관점에서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상인들이 이슬람 세력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았으며 때로는 멀리 동북아에까지 도달하였다. 

이러한 유럽의 문명적 승리에 대한 학술적 확신과 사회적 인식은 지난 19세기 유럽의 과학적 발전(산업혁명)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정반합의 법칙)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의 기원, 우열의 법칙 등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우리시대의 서구 지성을 대표하는 브로델의 지중해 연구는 지중해를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한 바다라는 유럽적 전통에서 기인한다.

유럽의 지중해가 열린 바다였다는 사실은 다음의 몇 가지에 근거한다.

첫째, 지중해는 근본적으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바다였다. 이집트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식량조차 자체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가 남긴 해양무역의 역사도, 중세 이탈리아 해상공화국의 역사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 지중해는 적어도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로 대표되는 이질적인 문명들이 공존하는 바다였다. 다름과 차이로 인해 수많은 갈등과 전쟁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무역활동과 인적교류도 활발하였다. 한 가지 예로 예루살렘은 세 종교 모두를 위한 성소(聖所)이자 성지순례의 도시였으며 경제와 문화 그리고 언어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인 교류의 공간이었다([그림 3] 참조).

셋째, 지중해는 유라시아 대륙에 있어 문명의 수준이나 역동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바다의 가장 큰 특징은 문명 간 교류에 있어 ‘외부 의존적 정체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근대 유럽대륙의 중흥, 다시 말해 유라시아의 서단에 머물러 있던 유럽대륙이 문명적 정체(停滯)와 몰락의 위기를 극복한 것은 고대와 중세에 걸쳐 지속된 외부의존적인 문명 정체성 덕분에 문명의 동남풍을 수용하면서 이질적인 문물들의 접변을 위한 시공(時空)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지중해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문명권의 경계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지중해는 한편으로는 고대 로마시대의 도로와 중세 성지순례의 루트를 통해 유럽대륙과 연결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북아프리카와 오늘날의 중동지역과 맞닿아 있었다. 이것은 지중해가 유라시아 문명 흐름에 있어 교차로(또는 터미널)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림 3] 참조). 문명은 살아있는 생물(生物)과 같다. 수용(수요)과 전달(공급)의 어느 한 가지 만으로는 자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새로운 문명의 호흡으로 이어갈 수 없다. 결국에는 외부문명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관계로 제한되거나 점파(點播)의 상황에 머물러 몰락하게 된다. 



II. 지중해. 문명 간 교류의 관점


지중해를 열린 바다로 정의하는 것은 이 바다의 문명 간 교류에 대한 역사-문화적인 접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의 지리-정치적인 접근에서 벗어날 경우 지중해의 문명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내해의 교류이외에도 유라시아 대륙의 지역 문명 간 교류라는 거시적인 접근을 동반한다. 이것은 ‘유라시아의 지중해’가 이 바다에 대한 지역학 연구의 한계를 보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럼 두 갈래의 학술적인 접근에 있어 유럽의 지중해와 유라시아의 지중해는 어떻게 구분되어야 할까? 전자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내해로서 과거의 연구에서 극단적인 대립의 장으로 해석된 바 있다. 반면 유라시아의 지중해는 교류의 관계를 통해 정립된 개념으로서의 지중해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교류의 속성은 소통(疏通)보다는 상통(相通)에 있으며 교류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관계의 구조 역시 대대(待對)와 유행(流行)의 개념적 해석에 기초한다. (대대(待對): 기다릴 待, 대답할 對; 유행(流行): 흐를 流, 갈 行. 위의 두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충돌, 아테네-스파르타의 문명적 충돌, 로마제국의 Pax romana, 르네상스에 대한 자생론적인 해석, 유럽과 이슬람의 문명적 충돌, 근대유럽문명에 대한 과학-이성적 해석 그리고 더 나아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로 표출된 서양문명의 지배적 패러다임 등은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


본 연구에서는 후자의 지중해를 ‘m’ 소문자의 지중해로 정의한다. 이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한 ‘M’ 대문자의 지중해가 품었던 교류의 유형을 일반화하는 과정을 통해 정제된 이론적 요체이다.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지역 문명 간 교류는 관계대상들 간의 ‘차이’에 의해 촉진된다. 여기에서 차이는 개념적으로 수준의 격차와 더불어 ‘다양성(Diversity)’을 가리킨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문명 수준의 차이는 인적교류와 더불어 각각 하행 지향성과 상행 지향성의 특징을 드러낸다. 반면 다양성의 수평적 구조는 자연환경, 경제구조, 사회 조직, 계층 간 구조, 정치권력의 정체성과 종교의 차이 등 다양한 측면을 포괄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필요에 따른 역학적인 구조 속에서 수요와 공급의 자연스런 흐름을 자극하면서 다양성 요인들의 상호교류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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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유라시아의 지중해들 



III. 유라시아의 지중해들


유라시아 대륙에는 여러 지중해가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m’ 소문자의 지중해가 그것이다. 이 지중해는 열린 바다의 정체성을 배경으로, 여러 지역문명들이 활발하게 교류하던 바다이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이러한 유형의 지중해가 적어도 4개 존재하는데, 이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사이에 위치한 지중해(A),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동부지역과 인도대륙의 서부지역 사이에 위치한 지중해(B), 인도 동부지역과 동남아 지역을 포함하는 지중해(C) 그리고 한-중-일의 사이에 위치한 지중해(D)이다.

본 연구에서는 유라시아의 동서(東西)에 위치한 두 지중해(A, D)를 대상으로 이들이 경험한 문명 간 교류의 유형을 지적하고 그 특징은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III-1. 자급자족의 경제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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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레반트: 대-소 문명 간 경계지역  


교류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할 첫 번째 요인은 해당 문명권이 자급자족의 경제구조를 갖추고 있었는가의 여부이다. 

유럽의 지중해는 근본적으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경제권이었으며 지리-환경적으로 규모 있는 문명권의 형성이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를 제외한다면 고대의 지중해는 연안을 중심으로 건설된 소규모의 수많은 해안 도시(polis)로 이루어진 바다였으며 이들의 교역 및 무역 활동은 주로 내부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교역활동도 자신들에게 부족한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항구 중심의 식민정책에 기초한 것일 뿐, 소규모 도시문명의 한계, 즉 인구와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영토 정복과 장기적인 지배의 식민주의 유형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또한 이들은 육로보다는 연안 항해에 더 크게 의존하였으며 내해의 도시 간 교역과 정치-군사적인 관계는 레반트와 그 너머 지역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소문명권의 현상과 구조적인 틀은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에서 보듯이, 중세에도 큰 변화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중-일의 동북아 지중해는 대문명권을 배경으로 성립하였으며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절대권력의 지배구조 하에서 식량생산은 민심의 향방에 가장 중요한 변수였던 만큼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자연 환경 역시 비교적 농업에 적합하였으며 주식과 관련된 농산물은 그 대부분이 대외적인 교역의 주된 거래품목이 아니었다. 동북아 지중해에 있어 교역은 유럽의 지중해에게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과는 달리 부를 축적하기 위한 활동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교류와 교역의 주체는 중앙권력이나 국가가 아니라 해안지역의 지방호족이나 권력가문이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사회계층과 통치 질서에 의한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III-2. 공존과 통로의 바다인가?


유럽의 지중해를 유라시아-아프리카의 바다로 정의하는 것은 이 바다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극단과 아프리카의 북부에 위치한다는 지리적인 이유보다는 이미 고대부터 문명적으로 육지와 바다의 수많은 길들을 통해 사실상 연결된 상태에서 동서 간의 다양한 문물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중해의 문명적 정체성은 이 바다의 동부지역에 해당하는 레반트(Levant)에 집중되었다. 이 지역은 아랍세력이 진출하여 아프리카 북부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면서 기독교 세계와의 접경을 크게 확대하기 전까지는 외부 문명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던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레반트 지역은 지역적으로 지중해에 머리를 내민 그리스 반도와 터키,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와 이집트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에 해당한다. 좀 더 넓게 보면 북쪽의 타우루스 산맥, 남쪽의 아라비아 사막, 서쪽의 지중해 그리고 동쪽의 이라크 북서 지역을 포함한다. 이미 고대부터 이 지역에서는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페르시아인, 이집트인 그리고 아라비아유목민들의 무역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아랍인을 의미하는 ‘arabo’의 어휘는 이미 고대부터 서구의 문헌에 언급되고 있었다. arabo의 시대적 의미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고대에 이 어휘는 Annali arriri에서 보듯이 개인이나 그룹의 사람들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이후 시대에 아랍인들로 간주될 그룹의 사람들에 속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종적인 그룹을 가리키기 보다는 삶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 밖에도 이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지면이나 종족을 의미하기도 하였다(Guidetti M. 감수, Storia del Mediterraneo nell’antichità IX-I Secolo a.C., Milano Jaca Book, 2004).)  이러한 지중해의 해상세력들은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서부지역과,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와 아프리카 동부지역과, 동쪽으로는 멀리 인도 지역과 그 너머의 동남아 해상세력들과도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명 간 교류의 관점에서 레반트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가는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의 세 종교가 이곳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으며 세속적으로는 유럽대륙의 영국과 북유럽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를 인도양의 관문에 해당하는 아라비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도와 그 너머의 지역들과 이어주는 전략적인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예루살렘은 종교와 세속의 다양성 요인들이 교차하는 접점의 멀티스폿(Multispot)이었다(비아 프란치제나-예루살렘-메카, 메디나). 경제, 종교, 학문 등 삶의 알파에서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대륙의 간선(幹線)들을 통해, 유라시아의 서단이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 영토적으로 통일되었던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과 그리고 멀게는 동남아와 그 너머의 동북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 문명접변의 멀티스폿(Multi Spot)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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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유라시아-아프리카의 종교벨트와 레반트 지역 


신비로 둘러싸인 동방의 이미지는 오히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유럽인들의 여행을 자극하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십자군이 군사원정의 대결구도에서 정치-전략적인 관계로 전환되면서 성지순례자들을 중심으로 신비의 동방에 대한 여행서적들이 등장하였는데, 도미니칸 리콜로 다 몬테크로체의 『성지순례 지침서(Liber peregrinationis)』, 프란체스칸 니콜로 다 포지본시의 『신대륙 안내서(Libro d’Oltremare)』, 페트라르카의 『시리아 여행(Itinerarium syriacum)』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III-3. 문명적 지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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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레반트: 대-소 문명 간 경계지역  


역사-문화적으로 유럽의 지중해는 처음부터 지중해 문명권이라는 독자적인 문명의 단위로 인식하기보다는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반도를 구심점으로 하는 문명권의 외곽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반면 동북아의 지중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명권을 실현한 바다로서, 유럽의 지중해에 비해 문화와 문명요인들의 공유성과 동질성이 높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 즉 다시 말해 내해의 지역적 편차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유럽 지중해 문명의 외부 의존적 정체성은 다음의 역사적인 변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 첫 단계로서 고대 그리스는 오늘날 서구의 민주주의, 이성과 논리에 근거할 때, 지중해 문명의 여러 씨앗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세계는 지중해의 지리적 한계를 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실제로 당시에는 지중해의 문명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은 유럽의 지중해를 레반트를 통해 그 너머의 선진문명권에 편입시키고 인식의 지평을 멀리 인도와 그 너머의 먼 지역들까지 확대하는 성과를 동반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지리상의 발견 이후 유럽문명의 인도양과 대서양 진출과는 달리, 동방에 대한 지리적이고 문화적인 호기심에 더 가까웠던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의 향료와 향수의 애호가로서 이와 관련한 목적으로 휘하의 해군제독들을 향신료의 주요 생산지인 인도에서 페르시아의 걸프 만까지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연안에 대한 탐험을 지시한 바 있다.   

로마제국은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걸친 거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하나의 법과 하나의 행정으로 통일하였다. 문명적으로 거대한 모자이크화에 비유되는 로마제국의 세계화 시도는 유럽대륙과 지중해를 그리고 게르만과 라틴을 하나의 문명단위로 하는 근대 지중해 문명의 성립을 준비했다는 역사적인 의미로 평가될 수 있다. 이미 로마시대에 지중해 상인들은 인도양과 인도의 항구들과 정기적인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부 상인들은 동남아와 중국으로부터 상아, 비단, 곡물 등을 구입하고, 최근 베트남의 고고학 발굴을 통해 알려졌듯이 금화를 지불하였다. 

하지만 외부문명의 본격적인 지중해 유입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고 유럽문명의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멀리 인도 동부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정복하고 그 너머의 동남아 지역까지 큰 영향을 미친 아랍-무슬림의 지중해 진출이었다. 

당시 이슬람 문명은 유라시아 지역문명 간 교류의 실질적인 주역들 중 하나였다. 아랍 유목민은 그 기원에 있어 복합문명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육지와 바다 모두에서 유능한 여행자이자 항해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의 유목민 기질은 다양한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선진 문명의 요인들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이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데 탁월하였다. 이러한 능력은 항상 불충분했던 필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어려운 자연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풍부한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근대유럽문명의 도약은 지중해 문명의 외부의존성 덕분이었다. 지중해의 레반트(Levant)지역은 외부세계의 문명들이 유입되는 통로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고대부터 유럽의 지중해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인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문명 교류의 주변부에 오래 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브롤터에 이르는 서지중해와 알프스 이북의 많은 지역은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 후기에 이르기 전까지 유라시아 문명의 서단(西端)에 빗겨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지중해는 이러한 외부의존성 덕분에 멀리 유라시아의 동단(東端)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문명 간 교류는 적어도 대서양시대의 도래 이전까지는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이슬람 문명권과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아라비아 반도를 거치는 간접 교류 덕분이었다. 7∼16세기에 이슬람 문명권은 북아프리카, 사우디아라비아 반도,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리고 북방의 초원 실크로드와 접해있던 흑해와 홍해, 카스피해의 주변지역들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몽고의 초원에서 발흥하여 사실상 유라시아의 동북부 지역을 통일하고 로마교황청과도 관계하였으며 (일찍부터)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원나라와도 다양한 유형의 교류를 전개하고 있었다.

지중해 문명의 외부의존적 정체성 형성에 있어 이탈리아 해상공화국 상인들의 역할은 중요하였다. 이들은 외부세계와의 통로역할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막대한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은 근본적으로 지중해의 외부세계와의 교역보다는 수입된 물품들에 대한 유럽의 소비를 통해 얻어졌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지중해 경제권에 있어 부의 이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지중해는 외부문명의 궁극적인 종착역이 아니었다. 지중해 역시 그 너머의 유럽대륙을 위한 중간 기착지였다. 지중해는 다양한 문명 요인들이 공존과 숙성과정의 시루효과를 통해 유럽문명권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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