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Travel _ 인류애를 경험했던 알제리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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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를 경험했던 알제리 여행기
정해원_부산외대 아랍어과
우리는 2020년 8월 임기대 교수님(지중해지역원)과 아랍지역학과 학과생 3명으로 팀을 이루어 코어사업단의 지원을 받아 알제리를 영상에 담아내기 위해 알제리로 향했다. 14시간의 비행을 통해 파리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알제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 오후 6시 무렵에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여보니, 공항이 깔끔하고 잘 갖추어져 있었다.
<알제리 공항>
알제에 도착하여 공항을 나오니, 임기대 교수님의 지인분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덕분에 택시가 아닌 지인분의 차를 타고 숙소까지 편하게 이동하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창밖을 보니, 유럽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은 숙소 근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오랜 비행시간으로 지친 우리는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알제리는 빵이 주식이기 때문에 조식은 빵이 나왔다. 숙소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정말 아프리카의 유럽답게 건축양식이나 풍경들이 유럽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와 비슷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건물들이라고 들었다.
우리는 바로 알제리 중부의 음자브 계곡에 위치한 가르디이아(아랍어: غرداية, 프랑스어: Ghardaïa)마을로 가기로 했었는데,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시간이 있어 수도 알제를 둘러보았다.
먼저 알제에 노트르담 성당에 갔다. 노트르담 성당은 1872년 프랑스 식민지 때에 건축되었고 프랑스어로는 ‘basilique notre dame d’afrique’라고 하며 아프리카의 노트르담이다. 안에 있는 마리아상은 검은 마리아상으로 유명한데 이는 마리아상의 피부가 검은색이어서 그렇다. 이걸 보면서 아프리카의 마리아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고 신기하였다. 내부는 촬영이 불가능하여,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다.
<basilique notre dame d’afrique> <basilique notre dame d’afrique>
이후 독립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1830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약 8년간의 독립운동 끝에 1962년 7월 알제리는 독립을 하게 되었다. 독립기념관에는 식민지 시절의 알제리의 아픔이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아픔을 받았던 나라이기 때문에 더욱 공감되고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가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날이 알제리 축구 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길거리에 사람들도 매우 많고 여기저기에 알제리 국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길거리 사람들과 같이 웃으며‘Vive l'Algérie(알제리 만세)’를 외치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알제리 사람들은 되게 친근하면서 재밌었다. 마치 2002년도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점심식사로 알제리 양고기, 소고기, 소 간 등의 구이를 먹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알제리 독립기념관> <알제리 독립기념관 입구>
<축구 결승을 응원하는 알제 사람들> <축구 결승을 응원하는 알제 사람들>
<독립기념동상> <샐러드와 각종구이>
이후 우리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가르디이아로 이동하였다. 비행기 편도로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가는 길에 창 밖을 보니 온통 사막이였다. 혼자 과연 사막 한가운데 도시가 있고 사람들이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디아야 공항에 도착하니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사막 한 가운데 이런 도시가 있다니 신기하였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가르디이야 주에 있는 음자부 계곡이라고 한다. 여기엔 사람들이 모여사는 5개의 크사르(요새화된 도시)로 엘아테우프(El-Atteuf)와 부누아라(Bounoura), 멜리카(Melika), 가르다이아(Ghardaïa), 베니이스게네(Beni-Isguen)가 있고 이것은 1012년부터 1350년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음자부 계곡은 11세기 초의 독창적이고 뛰어난 건축 기술과 엄밀성, 조직성 그리고 물을 모으고 나누는 독창적 시스템과 야자수 숲을 조성함과 같은 인간이 반사막 환경을 매우 효율적으로 이용하며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인정받아 음자부 계곡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음자부 계곡에는 은폐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바로 모자비트족이다. 이들은 베르베르인이며 이바디파이다. 중세시기에 음자부 계곡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우리는 공항에 마중 나와주신 무스타파 씨의 도움으로 숙소까지 안전하게 이동하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숙소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알제리 축구 결승을 보고 있었다. 우리도 같이 Vive l'Algérie를 외치며 같이 보았고, 결국 알제리가 우승하여 같이 춤도 추고 재밌는 밤을 보내었다.
다음날 숙소 조식을 먹었는데 사막인데에도 불구하고 싱싱하고 맛있었다. 이후 우리는 가르다이아 크사르 전통시장에 가보았다.
<숙소 조식> <전통시장 가는 길>
<전통시장 가는 길> <전통시장 가는 길>
전날 알제리 축구의 우승으로 시장이 평소보다 늦게 열었다고 했다. 시장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싱싱한 과일과 향신료 등을 보고 맛볼 수 있었다. 사막인데도 불구하고 싱싱한 과일과 빵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가르다이아가 알제리 남부 사막 지역과 수도를 연결하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고 하셨고, 때문에 모자비트족은 자연스럽게 무역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다.
수공예품도 굉장히 많았는데, 대부분의 모자비트족의 여성들은 집에서 수공예를 한다고 한다. 모자비트족 여성들은 다른 아랍국가의 여성들과는 옷차림이 달랐는데, 눈 한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리고 다닌다. 여성은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사진으로 찍진 못하였다.
<전통시장 입구> <전통시장>
시장 안쪽으로 가면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가르다이아 크사르를 볼 수 있다. 1053년 건축되었고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모스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11세기에 돌로 도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빛이 강렬하고 더운 사막지역에서도 시원함을 유지한다고 한다. 집들을 사각형으로 생겼고, 굉장히 따닥따닥 붙어있고 골목이 좁아 그늘을 많이 형성되어 있고, 창문도 창문살 만 있고 창문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시장과 가르다이아 구경을 마치니 정오쯤이 되었다. 우리가 알제리를 갔을 때가 여름이라, 오후 1시~4시 사이에는 40도가 훨씬 넘어 밖에 앉아만 있어도 사우나에 있는 것처럼 땀이 났다. 이러한 날씨 때문에 낮에는 숙소에 들어가 쉬었다. 쉬고 난 후 오후 5시쯤 공항에서 우리를 마중 나와 주었던 무스타파 씨를 다시 만나, 이바디즘 연구소로 향했다. 이바디즘은 이슬람교의 한 종파인데 현재 튀니지의 제르바섬, 오만, 그리고 알제리 가르다이아에 퍼져있는 종파이다. 오만은 이바디파라고 수업 시간에 배워 알고 있었지만, 알제리, 튀니지의 제르바섬까지 이바디파라는 것은 모르던 사실이였다. 연구원분들은 우리를 친절히 맞아주었고, 여기서 우리는 이바디파의 유래 및 역사, 이바디파의 계승 및 보존 방법 등을 알 수 있었다. 수업에서 배우는 것도 많지만 이렇게 직접 듣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이바디즘 연구소 연구원 분들>
다음날 우리는 베네스게네라는 가르다이아 두 번째 크사르에 갔다. 베네스게네는 이전에 보았던 가르다이아와 마찬가지로, 구시가지이고 11세기에 지어졌으며 마찬가지로 맨 위의 모스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주거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베네스게네를 둘러보던 중, 집들을 건축한 돌에서 조개 등의 바다흔적을 볼 수 있었다. 동행한 가이드 분의 설명으로는 이전에 음자부 계곡 전체가 바다였다고 한다.
<이전에 바다였던 흔적> <베네스게네 크사르지구 마나라>
베네스게네를 보고 숙소로 돌아와서 휴식을 하고 저녁쯤, 현대에 다시 새롭게 만든 신도시 타필렛(Tafilelt)로 향했다.
타필렛은 이전에 보았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요새화된 주거단지인데, 1997년에 누르 부족장님을 중심으로 주거문제해결을 위해 진행되었으며, 2000년에 첫 분양이 이루어졌다. 분양 우선순위는 능력이 되지 않고 집이 없는 사람과 부양부모를 둔 여성을 우선으로 주어졌다.
주거단지의 외부를 보면 집집마다 다 똑같이 생겼는데, 외부를 고치거나 꾸미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거주자들 사이에 빈부차이가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서로 배려하고 생각하는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라져가는 배려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었고 왜 이곳을 인류애가 살아있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엘아테우프(El-Atteuf) 크사르에 방문했다. 다른 크사르와 마찬가지로 요새화되어있었다. 건물들을 보다보니 특이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이전 주거단지도 마찬가지로 모든 주거단지의 벽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었다. 이것은 임의로 튀어나오게 하여 작은 그늘을 만드는 것이고 작은 그늘들에 의해 벽의 온도가 내려가게 된다. 다른 사막지방에서는 못 보았던 특징이고, 모자비트족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이곳에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발자취가 있다고 해서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곳의 시디 이브라힘 예배당과 가르다이아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시디 이브라힘 예배당에서 영감을 받고 건축한 건축물의 대표적인 예가 지금의 주차장이라고 한다. 예배당의 기둥과 주차장의 모습이 정말 비슷하긴 하다.
이후 숙소로 돌아와 쉬던 중, 가르다이아 대학생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대학생들은 IT분야와 공학 분야에 많은 관심이 있어 보였다. 되게 순수하고 공부에 열의가 넘치는 친구들 이었다. 서로 기분 좋은 대화를 하고 이후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날 저녁은 누르 부족장님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지만, 안타깝게 급한 일이 있으셔서 식사는 못하고 나중에 잠깐 오셔서 차를 마시며 인사를 나눴다. 이렇게 가르다이아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음자부 계곡의 대학청년들>
우린 가르다이아를 뒤로하고 가르다이아에서 남쪽으로 257km 떨어져 있는 엘골레아(el golea)로 향했다.
엘골레아가 사하라 사막에 위치하여 있어서 그런지, 가는 길에 끝없는 사막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중간마다 녹지가 보였다. 알제리는 자체적으로 사막녹지화사업을 지속적하고 있다고 한다. 엘골레아 점점 가까워질수록 녹지가 많아졌다. 엘골레아에 도착하니 대부분이 녹지였다. 우리는 엘골레아의 Forem이라는 NGO단체의 숙소에서 지냈다. Forem은 알제리 최대의 국제 NGO단체이고 알제리 전역에 25개의 지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소외된 지역과 사람들에게 교육 및 지원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엘골레아 Forem 지부>
Forem 엘골레아 지부의 타키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여주고 주변을 소개해주었다. Forem 엘골레아 지부 바로 앞에 공원이 있는데, 여기엔 호수와 사막이라고는 생각 못할 정도로 많은 식물이 있었다. 또한 동물도 있었다. 쉴 공간이 부족한 사막지역의 지역주민이 와서 쉴 수 있도록 Forem에서 인공호수를 만들고 가꿨다고 하였다. 근데 정말 아름답게 잘 만들어 놓았고 호수도 매우 컸다. 둘러보는 내내 지역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엘골레아에서 두 번째 날, 우리는 엘골레아의 사하라 사막으로 갔다. 나는 튀니지 어학연수 시절 사하라를 방문했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엘골레아의 사하라 사막은 더 붉고 식물이 많았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었다. 같이 온 친구들은 사막이 처음이었고 정말 신이 나게 사막을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사막에서 티타임을 가겼는데, 정말 좋은 시간이였다.
사막을 본 이후, 삶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던 샤를 드 푸코(Charles-Eugène Foucauld )가 지었던, 성당을 찾아갔다. 샤를 드 푸코는 군인에서 성직자가 된 후, 나사렛의 예수처럼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수도원에 하인으로 일하기도 하며, 신부가 된 후 그는 가장 척박하고 힘든 삶을 사는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알제리 사하라 사막에서 주민을 돌보며 삶을 살았다. 샤를 드 푸코는 주민의 종교와 상관없이 사랑을 실천하였다. 샤를 드 푸코는 1916년 프랑스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여파로 12월 1일 타만라세트에서 사누시파(Sanusiyah) 무슬림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생을 마감했다.
정말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성당이 있었다. 성당 옆에는 샤를 드 푸코의 묘가 있는데, 묘 또한 덩그러니 있었다. 하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고 더 빛나 보였다. 나는 가톨릭이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척박한 땅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이렇게 행동을 하고 삶을 살았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진정한 성자의 모습을 본 것 같았고 인류애를 느낄 수 있었다.
샤를 드 푸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알제리 여행을 마쳤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종종 잊게 되는 주변 사람들을 위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