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Travel _ Come stai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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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stai 이탈리아
안종욱(지중해지역원 HK차세대연구원)
이탈리아로 현지조사를 떠나기 이전까지의 나는 전공이 이탈리아어이기 때문에 나름 이탈리아 문화와 역사,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에 대해서 이미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굳이 이탈리아까지 가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서 그들의 생활을 간접체험 할 수 있다고 믿어왔었다. 이러한 생각이 이탈리아를 가보지도 않은 내게 ‘이탈리아는 어떠한 나라고 그 사람들은 어떠하더라’ 라고 하면서 나만의 편견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막상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 시작점부터 그 편견들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의 여행지역은 총 8도시이다. 북쪽 밀라노를 시작으로 볼로냐, 중부의 로마, 남쪽의 나폴리 그리고 다시 북쪽을 향해 가면서 피렌체, 파도바, 베네치아, 베로나 그리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왔다. 사실 이탈리아로 연수를 떠나기 이전에 몇몇 사람들이 이 계획에 대한 다른 조언을 받았었다. 우선 첫 번째는 이탈리아 외의 다른 유럽국가도 방문해보라는 것이었다. 유럽의 경우 솅겐조약(條約, 영어: Schengen agreement)으로 인해 유럽국가 안에서의 이동이 자유로웠는데 여권, 세관, 비자 등이 필요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에 다른 국가를 보기에 이탈리아라는 국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국가면적만 봐도 우리나라에 비해서 약 3배정도 크다. 또한 이탈리아는 각 도시들의 특징이 너무 다르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이탈리아 반도가 476년의 서로마의 멸망 이후 1860년의 통일되기 까지 코무네 (comune)라고 불리는 주민 자치 공동체로 인해 각 도시들이 서로 다른 국가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데에도 있다. 물론 이러한 늦은 통일로 인해 캄파닐리즈모(campanilismo)라고 불리는 배타적 고향애 라는 말이 생겼지만 덕분에 각 도시가 서로 다른 색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두 번째는 의견은 위와는 반대로 한 도시에만 머무르거나 혹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도시를 가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 의견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전공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안 가본 도시를 가거나 혹은 한 도시에만 머물면서 제대로 된 그 도시의 문화를 배우고 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생각한 것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 이탈리아를 가는 것이기 때문에 깊게 이탈리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유명한, 그리고 다양한 것을 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산업과 예술이 만난 밀라노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이 이유는 밀라노가 이탈리아의 주요 산업중 하나인 의류 산업을 대표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밀라노의 사람들은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패션 감각이 남달랐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른 도시와는 질과 양적으로 다른 패션샵의 존재이다. 단순히 밀라노에 있는 패션샵의 개수가 많은 것 뿐만 아니라 동일한 브랜드라 하더라도 밀라노의 패션샵이 다른 도시의 것보다 더욱 다양하고 트렌디한 옷을 보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패션샵의 손님들도 훨씬 다양하고 트렌디한 사람들이 많았다.
두오모 성당
필자가 이탈리아 탐방 중 봤던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 바로 밀라노 두오모였다. 우선 규모적인 면에서도 다른 성당들보다 컸지만 무엇보다 문과 벽에서 찾을 수 있는 성격 속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조각들이 매우 아름다웠다. 옥상에서는 조각상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모든 조각상이 성경속의 사도들이라고 한다. 또한 가운데 있는 금색 조각상이 바로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이라고 한다. 조각상들의 시야는 두오모의 바깥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성당이 이들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옥상에서는 또한 밀라노의 전경이 보였는데 특이한 것은 밀라노가 경제적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서울과는 달리 높은 고층 빌딩이 많이 없다는 점이었다.
<두오모 옥상>
최후의 만찬
밀라노에서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서는 예약을 해야만 하고 예약하고 들어가더라도 15분 동안만 감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제약은 최후의 만찬이 너무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다빈치가 그릴 때 전통 벽화 방식이 아닌 유화로 그렸기 때문에 손상이 보다 빨리 되었다고 한다. 또한 2차 대전 때의 폭격이나 홍수 등으로 인해 손상되어 가면서 더 이상의 복구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이탈리아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예약하려고 했지만 원하는 날짜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에 직접 전화를 했고 때마침 빈자리가 생겨서 들어갈 수 있었다. 15분 동안 마주한 최후의 만찬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작품이 훨씬 컸는데 벽화인 점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물 한명 한명이 누구인지를 보았고 그들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세밀하게 보았고 이후 남은 5분 정도는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구도를 감상했다. 어떤 틀에선지 다른 그림들보다 훨씬 실재감이 느껴졌는데 마치 벽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벽 너머에 이 모습이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
<다 빈치 - 최후의 만찬>
청년들의 도시 볼로냐
볼로냐는 이탈리아 학업의 도시로 유명하다. 유럽 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도 볼로냐에 있다. 볼로냐 대학교 근처에만 가면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건물 안에 있는 도서관에 들어가면 무겁고 정숙한 분위기와 동시에 열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 또한 무거웠는데 짙은 안개가 그 역학을 한 것 같다. 이러한 안개는 내게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시켜 주었는데 고대나 중세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 짙은 안개 속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어떠한 전략을 짰을 지에 대해 생각을 하며 버스를 탔더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볼로냐는 대학 외에도 사탑으로 유명한데 이 탑들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귀족들이 서로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탑을 높게 쌓는 경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많이 생겼다고 한다.
볼로냐에 또하나 유명한 것은 바로 볼로냐식 파스타이다. 이 파스타를 맛보기위해 다양한 식당을 돌아다녔는데 파스타의 맛보다는 이탈리아 식당의 문화를 느끼게 되었다. 이곳 식당의 종업원들은 의외로 나이가 많았다. 우리나라의 식당은 대개 젊은 학생들이 주로 종업원 일을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저씨서 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들의 모습에서는 보다 여유로움이 느껴졌고 이러한 분위기가 마치 손님으로서 가게를 찾은 것이 아니라 친구 집에 놀러가서 식사를 한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었다. 이러한 느낌은 종업원들뿐만 아니라 식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서도 느껴졌는데 다들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음식을 먹으면서 동시에 쉬다갔다. 한국에서의 전투적인 식사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역사를 걷게 되는 로마
로마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콜로세움이었다. 계속해서 성당을 보다가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오락 문화와 관련된 건축물을 보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콜로세움은 바깥에서 봤을 때랑 안에서 봤을 때 감동이 달랐는데 밖에서는 그 거대함에 한번 놀랐고 안에서는 그 구조에 다시 한번 놀랐다. 콜로세움의 기둥은 층마다 다른 양식이 들어갔는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되어있다. 또한 시민 계급에 따라서 앉을 수 있는 층이 나뉘었는데 낮은 층일수록 경기장이 잘 보였기 때문에 높은 계층이 앉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 내부를 볼 때 어디에 원로원이 앉았고 어디에 황제가 있었는지를 상상하면서 그 자리를 찾다가 시간이 다 가버렸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이드가 꼭 동반해야 했는데 필자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후에는 바티칸 대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 안에 들어가자마자 우릴 반기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였다.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다른 작품과는 달리 슬프면서도 결연한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많은 인파로 인하여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 외에도 이 성당에서 본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 중 가장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의외로 작품이 아닌 벽이나 기둥마다 붙어있는 조각상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이 보였다. 또한 기둥 근처의 벽에 그려진 그림들 또한 실제로 살아있는 듯한 입체감을 받아서 충격을 받았다. 성당 근처에는 바티칸 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여러 유명한 작품을 보관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다른 박물관이나 성당과는 달리 한국 오디오를 구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보다 훨씬 알차게 봤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박물관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에 오디오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가장 감명 깊었던 장소는 박물관 내부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이었다. 천장에는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고 그 주변의 벽에도 예언가 여인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한 장소에서 여러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정면에 있는 최후의 심판은 색감에서부터 화려했다. 이 작품 속에서 성경적인 인물들의 행동을 하나씩 보는 것이 재미있었는데 성경이라는 글을 이렇게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인물들의 표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에 놀랐다.
콜로세움 외부
콜로세움 좌석 배치도
콜로세움 내부 구조
로마를 돌아다니며 확실히 크리스마스의 이탈리아는 여행자들에게 좋은 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통편도 일찍 끊기고 가게들은 아예 열지 않기 때문에 피난민 마냥 미리 준비를 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여행이 아닌 이탈리아의 문화를 관찰하기 위해서라면 너무나도 좋은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축제 혹은 공휴일인 크리스마스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있어서 설날과 같은 명절이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크리스마스 날을 기념하는 것이 도시 전체의 분위기에서 나타났는데 우리나라의 상업적인 목적으로 꾸민 크리스마스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로마에서의 여행은 다른 도시와는 달리 문화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거리마다 유적지 같은 건물과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인들의 이런 노력이 단순히 그들의 관광업의 부흥을 위한 것뿐만이 아닌 범인류적으로 꼭 필요한 노력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중해성 기후의 나폴리
나폴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확실히 북부나 중부의 분위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첫 번째로 날씨가 훨씬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12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디건을 입는 것조차 더울 정도였다. 이로 인해 지중해의 기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백인계의 사람보다는 피부가 까무잡잡하거나 머리가 곱슬머리인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과거 나폴리는 해안선에 노출되어 있는 만큼 다양한 국가에 침입을 받았는데 이때 아랍계와 스페인계 사람들이 유입되면서부터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세 번째로는 좀 더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에서 느낀 것뿐만 아니라 도시의 전체적인 느낌에서도 받을 수 있었는데 길거리 곳곳에 보이는 상인들과 창가에 널린 빨래들을 보면서 인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사람들도 잔정이 많았는데 한번은 한 청년에게 길을 물어봤는데 주변에 있는 아저씨들이 대신 길을 안내해주고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값을 받아가기도 했다. 게다가 필자가 나폴리에 갔을 때가 새해(Il Capodanno)였기 때문에 저녁에 이어지는 폭죽축제가 있었는데 집에서 잠깐 내려오는 길에 나폴리 청년들이 폭죽을 나누어주고 같이 놀자고 하는 바람에 잠 못드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 전까지 내가 갖고있던 나폴리에 대한 편견(마피아, 부랑자등의 뉴스로 인한)이 폭죽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순간이었다.
나폴리의 해안가에 있는 카스텔 델 오보성은 내가 알고 있는 성의 모습보다는 많이 작았다. 멀리서 봤을 때는 바다에 떠있는 요새 같았다. 그 내부에 들어가서 본 나풀리 해안의 모습은 평화로웠지만 과거 전쟁이 일던 당시의 모습에서는 긴장이 끊이지 않았을 곳이라고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했다. 치르쿰베수비아나를 타고 폼페이에 도착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아직도 발굴과 보존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몇몇 곳은 못 들어 가봤지만 그 외의 곳들로도 충분히 폼페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다만 폼페이에 대한 배경적 지식이 없어서 놓친 부분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쉬웠다. 폼페이 내부로 들어가면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당시 화산 폭발로 인하여 사람들이 죽을 때 그 모습을 발굴해낸 것들이 있었다.
<폼페이>
<화산폭발 당시의 폼페이 사람들>
꽃의 도시 피렌체
이탈리아어로는 피렌체(Firenze),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라고 불리는 이 도시는 ‘꽃피는’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Florens’라는 형용사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도시의 이름에서부터 우리는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데 이것은 이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알게 해주는 시발점에 불과했다. 도시 어느 곳에서나 예술가들이 그 시대를 꽃피운 흔적을 찾을 수 있고 도시 중앙에 있는 쿠폴라(Cupola)를 통해서도 꽃의 봉우리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뿐더러 쿠폴라 위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를 통해서 도시 전체가 하나의 붉은 색 꽃을 연상케 하는 이 도시에서는 한순간도 꽃의 향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피렌체 두오모 대 성당는 기대했던 만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는데 이 성당을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속의 로봇이 생각났는데 아마 그 성당에서 보여 지는 체계적이고 정교한 구조, 창가나 뾰족하게 쏫아오른 구조물들로 인한 섬세한 표현 덕이었던 것 같다. 또한 이를 보면서 아랍의 모스크와 대조적인 느낌을 받았는데 아랍의 모스크는 보다 둥그스름한 라인으로 무언가 추상적이고 완곡한 느낌과 웅장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를 통해 피렌체의 성당과는 대비되는 괴수의 느낌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아닌 시각적인 느낌으로서만 말이다.
<피렌체 도오모 대 성당>
<쿠폴라에서 바라보는 피렌체>
그 다음 찾아간 곳은 우피치 미술관이었다. 이미 미켈란젤로의 여러 작품들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도 그의 작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않고 찾아왔다. 그러나 오히려 이곳에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의 작품에 다시 한번 감명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무언가 슬프면서도 분노가 담겨져 있고 색체의 선택에 있어서도 파격적이었다면 보티첼리의 작품은 우아하면서 아름다웠다. 특히 봄(Primavera)과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에서 보이는 색체의 편안함이 보는 내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사실 이탈리아에 오기 전부터 가장 기대했던 도시가 피렌체이다. 이탈리아에 대해 배워오면서 르네상스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그 모태나 다름없는 피렌체라는 도시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난 지금에도 너무 궁금한 도시가 바로 피렌체이다. 많을 것을 보았지만 동시에 놓치고 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이번 여행에서 피렌체의 향기를 맡고 온 것에 만족하고 다음 여행을 대비해야겠다고 느꼈다.
동화같은 도시 베네치아
처음 찾아간 곳은 베네치아의 부라노(Burano)라는 섬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마치 동화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각건물의 단색 화려한 단색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노력 하에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정해주는 세 가지 색들 가운데 선택하여 자기 집을 칠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섬이 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밑에 있는 섬인 무라노(Murano)는 유리 공예로 유명한 섬이다. 사실 이 유리기술은 과거 베네치아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첫 번째 이유로는 화재발생시 섬에서 일어날 경우 피해가 적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로는 베네치아의 유리세공 기술이 외부로 세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장인들이 유리세공 하는 현장을 보면서 그들의 노련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섬 여행을 끝마치고 베네치아로 눈길을 돌렸을 때 제일먼저 가게 된 곳이 산 마르코 성당이었다. 베네치아의 역사가 약탈의 역사임을 배우고 나서는 이곳에서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대했기 때문에 산 마르코 성당에서도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기대는 들어맞았다. 이 산마르코 성당은 성당의 이름에 있는 산 마르코라는 성인을 기리기 위한 성당인데 실제로 이 시체를 보관하고 있던 것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베네치아 인들은 본인 국가에도 상징성이 필요함을 느끼고 이집트로부터 이 유골을 몰래 훔쳐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성당의 여러 장식품들 또한 비잔틴으로부터 빼앗아온 것들이다. 비록 이들로부터 비롯된 문화는 아니지만 시민들이 이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본인들의 것으로 소화해 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베네치아의 수로>
<베네체아의 여러가지 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