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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共存)과 상생(相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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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52 조회 날짜 21-02-0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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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共存)과 상생(相生)



김정하(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우리는 글로벌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을 돌아보아야 글로벌 사회의 정체성 요인들을 찾아냈다. 요즘은 우리 속에 이미 글로벌성(Globality)의 특성들이 자리하고 있다. 생각과 행동 속에서 전통의 정서와 성향이 퇴색된 지 오래되었다. 우리의 삶은 빈자리로 남지 않는다. 시공의 연속성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빈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화(化)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항상 채워지고 또 비워진다. 하나이지만 세부적으로 수많은 삶의 다발들이 사로 다른 시간대의 상태로 얽혀있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그것이 역사든 경험이든 상관없이 나의 존재를 전후한 불과 몇 년의 시공만을 인식하는데 익숙하다. 때로는 예외적인 경우들이 생겨나지만, 일상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이러한 예외의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미필적 고의에 따른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상상되는 파생되는 그 무언가의 작은 발견에 의한 기쁨을 보상으로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침 무의식적인 커피 내리기, 화장실 가기, 머리감기, 새 옷 입기 등을 통해서도 작은 깨달음은 반복되며 이따금씩은 큰 깨우침의 지성(知性)에 이르기도 한다.

오늘 나의 반복적 일상에서는 공존(Co-existence, 共存)과 상생(Co-prosperity, 相生)을 떠올렸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생각에 비추어보면, 공존과 상생은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실제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 그리고 이보다 앞서 역사해석을 위한 구체적인 연구방법론의 차원에서 두 용어의 상대거리는 더 벌어진다. 영어 단어로 보면 위의 두 용어 모두 Co-existence로도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의 이해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공존은 함께 존재하는 상태이다. 관계는 존재하지만 관계구도의 다양성은 말하지 않는다. 그 정체성에서부터 성숙성, 과정의 흐름 단계 등에 이르는 다양한 차이도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함께 side by side일뿐 그 이상, 이하가 아닌 듯하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함께하는 모습이랄까? 인식하게 들리겠지만, 변화, 즉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으며 전후를 알 수 없는 정체(停滯)의 개념이다. 하지만 공존의 의미는 이에 대한 과정, 즉 변화와 새로운 존재의 성립과 이에 따른 관계구도의 성립을 계기로, 상생이든 편해(遍害)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관계구도와 작용 그리고 변천의 흐름으로 이해된다. 재래시장의 생선가게 자판 위에 눈을 뜬 채 죽어있는 생선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 강 아니면 수족관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인 것이다. 

우리의 글로벌 사회성은 공존의 차원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역사와 역사해석이 같은 것이 아닌 이유, 즉 역사연구에 있어 주관이나 판단의 개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해석에 있어 관계의 주체적인 요인들 중 하나의 기준을 채택할 것인지, 제 3의 판단을 도입할 것인지, 아니면 관계주체들이 모두 포함되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의 기준을 도입할 것인지에 따라 역사는 그 해석의 색을 달리한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시대의 지적 시공을 지배하는 이른바 시대관념에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무생물이 종과 속에 있어서 조차 차이를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의 판단도 그러하다. 공존은 판단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 

공존은 우리의 판단에 따라 고착된 상태와 변화나 흐름의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존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에는 모든 개체를 자타(自他)의 관계에 상관없이 차이에 대한 추가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차이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덕유화 화유육(德有化 化有育)를 가능하게 한다. (현무경 16面, 基礎棟樑(기초동량): 왈유도(曰有道) 도유덕(道有德) 덕유화(德有化) 화유육(化有育) 육유창생(育有蒼生) 창생유억조(倉生有億兆) 억조유원대(億兆有願戴) 원대유당요(願戴有唐堯) 기초동량종(基礎棟樑終))

이처럼 차이는 움직임(Motion)이며, 속도(Speed)이며, 새로운 차원으로의 과정(Course)이다.

공존의 관계구도 방정식에 ‘차이’의 상수를 도입하면 공존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크게 확대된다. 상생은 이에 따른 많은 결과들 중 하나로서 유무상생(有無相生)이다. (노자의 도덕경 상편 제 2장 참조)

우리의 삶을 전제할 때 상생은 가장 도달하기 힘든 과정의 한 단면이다. 아마도 대학의 지성소에서도, 현실이라는 삶의 공간에서도 관계구도의 모든 요인들이 각자의 기준에서 만족한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모든 구성요인들의 만족은 정체상태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럼 상생은 도달하거나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변화의 지향성 그 자체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생노병사, (자연의) 춘하추동, (우주의)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세상에 그 자체로의 영원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끝없는 화(化)의 생(生)이며, 생(生)의 육(育)일 뿐이다. 

상생은 거시적 차원의 역사연구에서도 그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역사의 흐름은 상생의 과정으로서, 관계균형 지향성의 흐름에 대한 고찰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지배-피지배, 온갖 차별의 역사인식, 추종과 모방, 우열(優劣)의 판단, 타자(他者)를 배제하는 자아 중심의 사고(思考)를 위한 여지만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매 순간, 모든 과정에는 차이의 상반성이 존재했다. 차이의 역사 관념에서는 차별이 ‘다양성(Diversity)’의 타자를 통해 균형의 상태를 지향하며 보다 온전한 의미로 드러난다. 역사해석에 있어서도 지배와 피지배, 우와 열 등의 차별방정식은 다양성의 타자를 통해 보완되고 상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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