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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S Culture _ 시칠리아의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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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지중해지역원 Hit 4,863 Hits Date 21-06-30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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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의 이슬람



명지대학교 이종화




1. 고대역사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로부터 지리적, 전략적, 통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섬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시칠리아를 차지하기 위한 세력들 간의 싸움은 긴 역사를 통해 진행되었고 이는 시칠리아가 다양한 문화의 혼합과 융합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게 한 계기가가 되었다. 시칠리아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BC8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진출하면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칠리아는 주로 해안가를 중심으로 그리스 도시 식민국가가 건설되며 그리스적 문명의 번영을 누렸으나 당시 시칠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프리카에 건설된 카르타고 제국이 시칠리아로 진출함으로써 몇 세기 동안 그리스와 카르타고 간의 주도권 싸움의 전장이 되었고 그 결과 카르타고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시칠리아는 로마의 성장과 진출에 따라 카르타고와 로마의 격전장이 되었으며 포에니 전쟁(BC264~146)의 결과로 인해 시칠리아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9세기 북아프리카의 아랍‧이슬람 왕국이었던 아글라브 왕조(Banū al-Aghlab)가 시칠리아를 점령하여 시칠리아 에미리트 왕국을 건설하여 번영하였으나 노르만 세력의 침략으로 인해 1091년 멸망하였고 이후 시칠리아는 노르만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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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칠리아의 이슬람 


이슬람의 시칠리아 정복은 826년 시칠리아 동로마 함대 지휘관이었던 에우페미우스가 당시 튀니지를 중심으로 통치하던 아글라브 왕조의 아미르인 지야다트 알라에게 건의하면서 시작되었다. 827년 동로마 제국과의 첫 전투를 시작하였고 1년간의 공방전 끝에 시라쿠사를 정복하였으나 페스트로 인해 후퇴하였다. 830년 병력을 증강한 이슬람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결국 831년 팔레르모를 오랜 포위전 끝에 점령하였다. 이슬람군은 시칠리아 에미르 왕국을 건국하고 팔레르모를 알메디나로 이름을 바꾸어 수도로 삼았다. 859년에는 시칠리아 내륙의 중심 요새인 엔나를 정복하여 내륙을 장악했다. 870년에는 몰타섬을 점령하였고 878년에 동남부의 주요 항구도시인 시라쿠사를 함락하였다. 902년에는 타우루메니온을 함락시킴으로써 시칠리아를 이슬람세력으로 편입시켰다. 시칠리아 에미르 왕국(831~1091년)은 압바스 제국과 파티마 왕조에 종속되었으나 독립왕국을 유지하였다. 파티마 왕조의 약화를 기회로 지리왕조(Banū al-Zīrī)가 시칠리아를 점령하였고 이후부터 시칠리아 에미르 왕국은 독립을 유지하며 지리왕조에 종속되었다. 시칠리아 에미르 왕국은 토지 개혁과 농업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시칠리아에 경제적 부를 증가시켰으며 피정복민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관용정책을 펼쳐 문화적 부흥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정책은 지중해 전역의 사람들을 팔레르모로 모여들게 하여 인구 35만 명에 달하는 유럽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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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 간의 공존의 땅 


1091년 노르만 세력이 진출하며 시칠리아의 이슬람 통치는 막을 내린다. 새로운 정복자는 이슬람의 통치 전통을 답습하여 피정복민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관용정책을 펼치게 됨으로써 시칠리아는 그리스, 아랍, 기독교 문화가 공존하는 문화 융합의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종교와 민족 간 융합이 만개했던 시기는 루지에로 2세(1130~1154재위)의 통치 시기였다. 그는 그리스도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문화를 존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랍어를 배우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그의 시기에 시칠리아는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문화적 번영기였다. 그가 대관식에서 착용했던 망토의 문양은 유럽과 이슬람 양식이 조화되어 새겨져 있었는데 특히 망토의 밑자락은 아랍어 서예 장식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아마도 루지에로는 자신이 시칠리아의 모든 종교와 민족을 통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드리히 2세(1198~1250년 재위) 또한 타 종교에 대해 관용과 관심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통치시기에 시칠리아에서는 “길게 기른 수염에 옷자락을 휘날리는 바그다드 출신의 천문학자들과 아랍어 저술을 번역하며 후한 급료를 받는 유대인들, 사라센의 무용수와 무희들, 축제 때면 은나팔을 불던 무어인들을 볼 수 있었다” 고 한다. 

종교간 화합의 상징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카펠라 팔라티나 궁정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의 구조를 보면 촛대와 설교단은 노르만 양식으로, 돔과 성화는 비잔티움 양식으로, 아치와 천장은 이슬람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다. 마치 박물관을 보듯 노르만, 비잔티움, 이슬람 건축 양식을 모두 한 공간에 섞어 놓았다. 특히 천장은 북아프리카와 안달루스에서 즐겨 사용하던 벌집모양의 이슬람 건축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건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이 있다. 이와 함께 기하학적 형태의 아라베스크 문양과 아랍어 서체 문양을 장식으로 사용하여 천장만 본다면 기독교 예배당이 아닌 이슬람 모스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13세기 후반 시칠리아 왕위 문제에 교황이 개입되고 난 이후 타 종교와 문화의 관용이라는 문이 닫히면서 시칠리아는 문화융합과 공존을 대표하는 지위를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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