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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S Culture _ 시리아 기독교인의 멸종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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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7,381 조회 날짜 22-01-1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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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시리아 기독교인의 멸종위기?



노리코 사토 (부경대학교 일어일문학부 교수)



I. 서론


레반트 지역에는 고대부터 많은 기독교인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기독교인 디아스포라는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 기독교인 인구가 많았던 시리아에 주목하면 1956년에는 시리아 총인구 중 기독교인 비율은 15% 정도였으나 2011년 시리아 전쟁 발발 전야에는 10%까지 감소하였다. [Fakhr, Saqu Abu. 2014. “As-Safir on the History of the Persecution of Middle Eastern Christians,” Orthodox Christianity, January 2, 2014. https://orthochristian.com/67243.html (accessed 10 January, 2022)].

전쟁 이전에는 약 150만 명의 기독교인이 거주했지만 2020년 현재에는 총 인구의 2.5% 정도, 즉, 약 4만 5천 명만이 시리아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U.S. Embassy in Syria. 2021. “Syria 2020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Report,” U.S. Embassy in Syria, 10 June, 2021. https://sy.usembassy.gov/syria-2020-international-religious-freedom-report/ (accessed 10 January, 2022)].

이들리브 (Idlib)와 근교에서는 집을 떠난 기독교도들을 부재지주로 판단해 그들의 부동산을 이슬람 당파들이 몰수하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Khalifa,Ninar. 2020. ““Absent Christian”… Confiscation of real property of Idlib’s Christians,” Enabbalad 7 November, 2020. https://english.enabbaladi.net/archives/2020/07/absent-christian-confiscation-of-real-property-of-idlibs-christians/#  (accessed 10 January, 2022)].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이처럼 외국으로의 이주나 기독교도의 권리 침해로 인해 조국에서 기독교도의 문화 기반이 상실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전쟁만이 기독교인 디아스포라를 가속시키는 원인은 아니다. 19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이 고국을 떠나 유럽, 미국 등 원격지로 이민을 떠나는 추세가 가속화됐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의 공존을 저해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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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us Groups of Syria (2011)  Neal Rauhauser.2013.  “Syrian Sects & Ethnic Groups,” Neal Rauhauser.

https://nealrauhauser.wordpress.com/2013/06/15/syrian-sects-ethnic-groups/ (accessed 10 January, 2022).]

 



II. 기독교 교파 분기와 시리아 기독교 교파의 다양성


첫 번째로 시리아에는 어떤 기독교 교파가 존재하는지 보자. 교파 분기 과정을 보면 시리아가 이슬람교 세력에 정복되기 (634-640) 이전부터 기독교인들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교파의 분기는 고대 기독교 공의회의 논의와 관련이 있다. 

예수의 위격 (hypostasis)은 하나가 아니라 신성과 인성의 2가지 위격으로 분리된다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파(Nestrianism)가 431년의 에페소스 공의회 (Council of Ephesus) 에서 이단으로 간주되어 분기되었다. 현재 이 종파를 계승하는 것이 아시리아 동방교회 (Assyrian Church of the East) 이다. 예수가 하나의 위격 (hypostasis)로 신성과 인성을 갖추었다고 주장하는 합성론 (Miaphysite) 교회가 451년의 칼케돈공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비칼케돈파와 네스토리우스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회와 합동하지 않은 교회들이 오리엔탈 정교회들 (Oriental Orthodox Churches) 이다. 현대 시리아에 존재하는 여러 교회들에서 비카르케돈파의 시리아 정교회(Syriac Orthodox Church)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Armenian Apostolic Church), 그리고 네스톨리우스파의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오리엔트 정교회에 포함된다. 비칼케돈파에 소속된 교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나중에 합동으로 만들어진 마론 전례 가톨릭교회(Maronite Church)와 시리아 가톨릭교회(Syriac Catholic Church), 그리고 아시리아 동방교회에서 분기된 칼데아 가톨릭교회 (Chaldean Catholic Church)도 시리아에 있다. 

 카르케돈파 교회는 1051년에 로마가톨릭교회와 그리스정교회 (Eastern Orthodox)로 분열되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시리아에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아랍어를 구사하는 평신도들과 그리스어권 출신 상위 성직자들의 관계가 악화되어 시리아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7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통일된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교회 (Melkite Greek Catholic Church)를 만들어 그리스 정교회에서 분리하였다. 

시리아 정교회 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또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분기한 개신교회들도 시리아에 존재한다. 아래 그림은 기독교 교파 분기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리아에 고대부터 기독교 교파가 다수 존재했으며 기독교파 분기과정은 지역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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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yokawa, Hiroko (三代川寛子). 2017.「はじめに」In『東方キリスト教諸教会:研究案内と基礎データ』(ed.) H. Miyokawa: 3-8. Tokyo: Akashishoten. P.5]



Ⅲ.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오스만 제국 말기의 공존 붕괴


7세기 전반 이슬람교 교도들이 시리아를 정복한 이후 시리아에서는 종교적 ・민족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공생해 왔다. 현대 시리아의 인구 구성을 보면, 소수파의 기독교인 인구 이외에 무슬림은 순니파가 다수 (74%)이며, 시아파인은 알라위파 (Alawite) (11%)와 이스마일파(Ismaili) (1%) 와 열두 이맘파(Twelver Imami) (0.5%)가 존재한다.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앙을 조합한 일신교인 드루즈교(Druze)의 신앙인들도 존재한다. [Cultural Atlas. 2022. “SyrianCulture Religion, “ Cultural Atlas. https://culturalatlas.sbs.com.au/syrian-culture/syrian-culture-religion(accessed 10 January, 2022)].

민족적으로 아랍인, 쿠르드족(Kurds), 투르크멘인(Turkmens), 체르케스인 (Circassians)과  드루즈인(Druze)과  아르메니아인 (Armenians)과  시리아인(Syriacs ; Aramean-Assyrian-Chaldeans), 그리고  유대인 (Jews)과  예지디 (Yazides)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한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평화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리고 공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설명한다. [ibid. (accessed 10 January, 2022)].

평화적 공존의 원리가 무너진 것은 오스만제국 말기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millet은 비무슬림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millet 시스템에서 기독교인은 dhimmi로 불리며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지만 인두세와 군사세를 커뮤니티 단위로 지불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즉, 이 시스템은 이슬람교의 우위성을 기반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기독교인은 제국 신민으로서 무슬림과 평등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 시스템은 과도한 박해 없이 다양한 종파의 공존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제국의 약화와 유럽 국가들의 제국 간섭이 진행되면서 이슬람교 우위성의 원칙에 변화가 생겼다. 유럽 국가들은 불평등에 근거한 공존을 문제시하여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었다. 

내정간섭은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예를 들어, 시리아의 제2의 도시 알레포에서는 유럽 출신의 가톨릭 기독교 선교사들이 1620년대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기독교인 상인들을 보호해주게 되었다. 유럽 국가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보호는 종교적 차이의 정치적 이용이다. 보호를 누리는 기독교인들의 유럽세력에 대한 의존이 강화되면서 비무슬림이 지나치게 우대받는 데 대해 무슬림들은 불만을 갖게 됐다. 무슬림은 반기독교인 감정을 분출하고 종교에 근거하는 신민의 분리가 진행되었다. [Makdisi, Ussama. 2019. Age of Coexistence: The Ecumenical Fram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Arab World, Oakland:  Universityof California Press. pp.51-64].

종교에 기초한 신민의 분리의 예를 보자. 레바논 산악지대의 농민들은 드루즈 봉건계급에 의해 부과된 중세에 대한 불만으로 봉기(1858-59) 하였는데, 이것이 말론파  기독교도들과 드루즈파 신앙인들의 무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유럽 세력들의 개입으로 양 종파의 영역 구분이 시작되었다. 레바논 산북부 지역는 말론파 기독교도들의 세력 범위였고, 남부 지역는 드루즈파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 종파 갈등은 다마스커스에까지 파급됐고 여기에 프랑스가 개입해 기독교인을 보호하는 정치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제국 내 혼란과 유럽세력의 내정간섭을 피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헌법 (1876)은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신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인정했다. 유럽 근대화 사상을 도입한 개혁운동 탄지마트는 종파 분단이 촉진되고 있는 정치 사회 환경 속에서는 유효하지 못했다. 터키 민족주의 운동이 현재 터키 공화국의 지역 내에서 고양되자, 기독교인들은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터키인 무슬림과는 동화 불가능한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학살과 강제 퇴거로 인해 고향을 잃었다. 특히, 1915년은 기독교도 박해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현재의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국경 근처에 살고 있던 기독교도들은 시리아 쪽으로 이주했다. 알레포나 시리아 북동 지역에 기독교인이 다수 거주하는 이유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로 그들이 강제 이주 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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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urch at Qalb Loze in the Dead Cities, Syria (460)  

The Dead Cities are a group of 700 abandoned Christian settlements between 4th and 11th centuries in northwestern Syria. 




IV. 다종파의 공존은 가능한가?: 기독교인들의 모색


오스만 제국 해체(1922) 후, 프랑스가 시리아를 위임 통치 했습니다(1923-46). 프랑스는 민족이나 종교 집단 간의 분단을 강조하여 지배를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이 종파주의 정책으로 고립될 것을 우려한 기독교인들은 다른 시리아인들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안툰 사아데 (Antoun Saaadeh)가 제창하는 대시리아 주의에 입각한 내셔널리즘 운동을 지지했다. 대시리아 주의는 고대 시리아의 영역 개념을 적용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나이 반도를 포함한 지역을 지리적으로‘대시리아’라 했다. 이것은 이 지역에 고대부터 거주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를 시리아 고유의 특색으로 정의하는 시리아 국가주의이다. 보이스카우트나 축구등의 스포츠 클럽을 커뮤니티 단위로 형성해 전국 규모의 대회에 참가하는 운동이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 발전했다. 이 젊은 층 주도의 운동은 정치적으로는 대시리아 주의의 실천이다. [Erlich, Haggai. 2000. “Youth and Arab Politics: The Political Generation of 1935-36,” In Alienation or Integration of Arab Youth: Between Family, State and Street, (ed.) R. Meijer, 47-69. Richmond, U.K.: Curzon. P.60.]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소수파의 기독교도들은 시리아 사회에서 다수파와 공존하고 평등한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대시리아주의를 지지했다. 시리아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고, 민족적으로 아랍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대시리아 주의는 종교에 의한 분단을 회피하기 위해 유효한 정치적 주장이었다. 이때부터 기독교인들이 소속 교회인 전례 용어를 모국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고대부터 시리아에 존재하는 언어의 계승자임을 증명하는 전례 용어는 기독교인들이 시리아 문화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사회적 평등을 획득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시리아어를 전례용어로 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예로 들어, 시리아인의 동일성과 전례용어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시리아에는 현대에도 아람어(Aramaic)의 방언인 시리아어 (Syriac)를 전례용어로 사용하는 종파가 있다. 이들은 시리아 정교회(Syriac Orthodox Church)와 칼데아 가톨릭교회, 말론 전례 가톨릭교회와 시리아 가톨릭교회 (Syriac Catholic Church)그리고 시리아 개신교교회(Syriac Protestant Church)이다. 이들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아랍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하는데, 그들이 조상으로부터 계승한 언어는 시리아어 (Syriac)라고 주장한다. 아랍어가 시리아에 보급되기 이전의 대시리아에서는 그들 전례용어의 기원인 아람어(Aramaic)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대시리아의 고대 언어인 아람어의 계승에 의해, 이 기독교인들은 시리아 고대 주민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원주민이라는 사실은 사회적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효과적이다. 

1960년대에 범아랍 주의 세력이 우세해지고 시리아가 아랍어를 하는 아랍민족 국가라는 주장에 따른 정책이 실시되자 모국어가 아랍어가 아닌 기독교인들은 아랍민족으로 인식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 대부분의 아랍인은 무슬림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으로도 다수파와 분단된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정치적 권리를 상실할까 봐 두려워했다. 이러한 불안을 키운 것은 기독교인 인구가 많은 시리아 북동지역에서 아랍인과 민족적으로 분리된 쿠르드인들에 대한 국적 박탈 실시였다. [Aoyama, Hiroyuki (青山弘之). 2005. 「シリアにおけるクルド民族主義政党・政治組織(1)(研究資料)」現代の中東 Vol. 39: 58-84. Institute of Developing Economies, Japan External Trade Organization (日本貿易振興機構アジア経済研究所). P. 60.]  오스만제국 말기의 상황과 유사하게 민족주의 내셔널리즘과 종파주의에 의한 분단이 기독교도인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으로의 기독교인 이민이 증가 하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 시리아 정부는 종교적 다문화주의 정책을 범용하게 되었다. 국내에 존재하는 기독교 종파들을 시리아 고유의 종교 집단으로 이슬람교 종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회적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인정하는 정책이다. 시리아에서 존속해온 종교는 시리아인이 유지하고 발전시켜온 시리아 문화의 일부이며, 시리아 종교집단들은 그 문화의 계승자로서 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이 같은 시리아주의는 종교를 문화와 언어라는 표상으로 환원함으로써, 다양한 종교집단의 평등성 및 공존을 도모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실패가 국민을 빈곤하게 만들면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정부에 의한 민주화 운동 탄압을 계기로 운동이 무력 투쟁화되자, 종파 대립이 격화되었다. 시리아의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성을 이용해 미국・이란・터키・러시아 등 외국 세력이 시리아 내정에 간섭하고 있어, 2011년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다. 오스만제국 말기에 국가가 약화되고 외세가 내정에 간섭 하게 되었기 때문에, 광신적 종파주의가 다양한 종교집단들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한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21세기 현재도 사회의 불안정과 외세의 내정간섭이 소수파인 기독교인들을 위협하고 있다. 종교적 차이가 정치나 무력 투쟁에 이용되면 종파주의가 강화돼 무슬림과 기독교도의 공존이 어려워진다. 이슬람국(ISIS)나 과격 이슬람 종파들 (예: 하라카트 아라르 알샴 알이슬라미야)는 이슬람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기독교도들을 무력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난민이나 이민이 되었다. 

동부 시리아 지역의 쿠르드인은 서 쿠르디스탄 로자바 (Rojava) 행정부를 수립할 기회를 얻었지만, 이 행정부가 이 지역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권리나 평등을 존중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쿠르드인은 쿠르드 민주 통일당 (PYD-Democratic Union Party) 주도로 국민국가주의에 입각한 동화정책에 반대하고, 지역 거주 주민들의 문화적·민족적 다양성을 서로 용인하는 민주주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로자바내에 시리아어 (Syriac)를 전례용어로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을 Syriac이라고 인식한다.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다양하고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아람인 혹은 아시리아인 혹은 칼데아인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Syriac에 포함된다. Syriac은 통일된 민족적 동일성을 확립할 수 없으므로 분열되어 있다. 이 민족적 분열이 교육 분야에서 독자적인 민족 교육을 추진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교회 주도의 사립학교에서 종교 및 전례용어 관련 교과목들을 알아사드 정권 하에서 가르쳐 왔음에도, PYD 주도로 개정한 교육 커리큘럼 도입(2016)에 대해 단결하여 반대할 수 없었다. 

민주화 개혁은 PYD의 쿠르드인 주도로 추진되고 있으므로, 쿠르디스탄 노동자당 (PKK- Kurdistan Workers' Party) 주동자인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 의 민주화 이념을 추진하고 있다. [Zeno, Basileus. 2021. “Educationand alienation: The case of displaced Syrians and refugees,” Digest of Middle East Studies, 2021, 30: 284–294. P.287.]

Syriac 사람들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에서 쿠르드인 중심의 민족교육 이념을 수용하는 것은 Syriac 사람들이 민족 집단으로서 다민족 공생을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시리아어를 전례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여러 종파에 소속되어 있다. 비록 같은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라도 민족 동일성에 대한 인식은 다양하다. 과격 이슬람 조직의 공격을 받아 인구가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도들은 이렇게 단결하지 못하고 있다. 불안과 공포로 기독교도들의 해외 이민이 증가하면서 시리아에 잔류하는 기독교인 인구가 줄고 있다. 시리아의 기독교도는 멸종 위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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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riac Orthodox Christian immigrants in London




V. 결론


시리아에서 기독교도들이 무슬림이나 다른 종교·민족 집단과 평화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구축할 방법은 있는가? 오스만제국기의 millet은 이슬람교의 우위성을 기반으로 하였으므로 불평등했지만 기독교인들에 대한 과도한 박해를 막고 다양한 종파의 공존을 유지하였다. 국민국가 내셔널리즘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을 시리아 고유의 집단으로 인식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려는 한편, 아랍인 무슬림에 대한 동화 및 융합을 추진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시리아 현대 사람들이 사회 변혁을 요구하며 싸우게 되자, 기독교인들은 무력 투쟁의 표적이 되었다. 로자바의 쿠르드 민주주의는 지역 주민들의 민족적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주장하지만, 기독교도들이 민족적 동일성을 주장하고 단결할 수 있는 것인가? 종교적 민족적 평등과 공존을 모색하지 않으면 시리아에서 기독교인 인구의 유출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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