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Focus _ 지방의 작은 연구소에서 글로벌 지중해 지역학 연구의 허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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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작은 연구소에서 글로벌 지중해 지역학 연구의 허브로
윤용수(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장)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HK)사업-가보지 않은 길
인문한국(Humanities Korea)사업이 시작된 2007년은 대학 연구소뿐만 아니라 한국 대학 사회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점이 된 획기적인 해였다. 인문학과 해외 지역학 분야 세계적 수준의 연구소 육성이라는 목표 아래 연구소를 대학의 한 축으로 정착시키려는 이 사업은 10년의 장기 사업, 학과 교수와 동급 대우의 연구소 소속 전임 교수 채용과 정년 보장(tenure) 등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내용으로 가득찬 파격적인 사업이다. 때문에 이 사업은 연구 책임자를 포함한 연구 참여자는 물론, 대학과 관리 기관인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등 HK사업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매우 낯선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학과 중심의 대학 풍토에서 연구소는 파트너가 아닌 간판만 내걸고 있는 장식재인 경우가 많았다. 학과에는 교수가 있고 연구소에는 교수가 아닌 연구원이 있는 계급 구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대학의 풍토에서 학과와 연구소가 상호 협력하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만들겠다는 이 사업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도 여겨졌고 많은 오해와 의미없는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낯선 길을 개척해 가면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 진통은 오랜 기간동안 계속되었고 아직도 진행형인 경우도 있다.
대학은 새의 양 날개처럼 교육과 연구가 상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육 현장의 요구가 연구에 반영되어야 하고, 연구 성과가 교육으로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HK사업은 대학의 비정상화를 정상화하는 사업이라 할 수도 있겠다. 또한 HK사업은 긴 호흡의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서 추진해야만 하는 연구 아젠다에 도전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제공했다는 것만으로도 평가받을 만 하다.
많은 우려와 기대 속에 HK 1기 사업 10년이 마무리 되고 있는 이 시점에 이 사업의 초창기부터 직접 참여하며 지금까지 달려온 당사자의 입장에서 지난 10년 HK사업의 성과를 돌이켜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인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이 추구했던 목적의 상당 부분은 달성되었다고 믿는다. 대학 연구소에 연구를 전업으로 하는 교수들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제도가 정착되고 있고, 학과와 연구소의 협업 체계가 보다 생산적이라는 것을 대학 구성원들은 물론 정부 당국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2016년 시작된 교육부 주관 코어(CORE)사업의 목표중의 한 가지가 학과와 연구소의 협업을 통해 보다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HK사업에 참여한 모든 연구소가 이 사업의 목표인 세계적인 연구소로 발전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토대와 기반을 갖춘 것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역 연구의 변방에서 허브로
필자가 몸담고 있는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의 사례를 통해 HK사업의 성과를 보겠다.
HK사업 이전 지중해지역원은 지방의 중형급 대학에 있는 작은 연구소였다. 1997년 지중해 지역에 대한 학제적 종합 연구를 하겠다는 목표와 의지로 설립된 지중해지역원(당시는 지중해연구소)은 설립 이후 등재지 1종을 1년에 2차례 발행하고 학술대회와 초청강연회 정도를 개최하는 지방의 작은 연구소였다.
당시 지중해연구소는 한국연구재단(당시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 사업을 진행하며 관련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존재감이 미미한 유아기 수준의 연구소였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평가받고 있던 지중해연구소는 2007년 HK사업 연구소로 지정되며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우선 조직을 지중해지역원으로 확대 개편했다. 인류 역사와 문명의 요람이자 현장이라는 지중해의 문명적 특성, 기독교와 이슬람, 유럽, 아시아와 북아프리카가 공존하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여 지중해지역원만의 정체성과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는 연구 아젠다로 '지중해 지역의 문명간 교류 유형 연구'를 설정했다. 문명 교류 연구는 세계적으로도 유아기 단계의 연구이기 때문에 연구 아젠다를 선점한다는 효과도 기대했다.
<다국어지원지중해웹서비스시스템(MMWS)>
그러나 국내에는 지중해 개별 지역에 대한 연구자는 있지만 이들 지역을 아우르는 통찰력을 가지고 문명 교류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자는 극소수였다. 지중해 각 지역의 인문학과 사회학 분야의 다양한 전공을 가진 연구 인력으로 HK연구 인력을 구성했지만 문명 교류학은 초지역적, 초학제적 연구이기 때문에 본인 전공을 극복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필요했다. 이미 각자의 전공에 익숙해 있는 연구자들에게 이러한 요구는 본인의 허물을 깨고 나오는 새로운 도전이자 시험이었다. 지역간ㆍ문화간 단순 비교 연구를 넘어선 종합적인 융합연구가 필요했다. 연구 사업을 이끄는 연구 책임자의 고민이 여기에 있었다.
본인의 전공을 벗어나 문명 교류학으로 나아가는데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만큼 연구 아젠다와의 부합성을 위해 최소한의 절대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지중해지역원은 2단계 평가까지 연구 아젠다와의 부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지중해지역원은 분절적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연구 클러스터를 조직하고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공동 연구를 수행했다. 각 클러스터를 통해 정기적으로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고 학문적으로 소통했다. 해외의 지중해 지역 연구 기관과 협약을 맺고 이들과의 공동 연구를 수행했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문명 교류학을 연구하는 연구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대학원 과정을 개설해 차세대 연구 인력들을 양성했다. 기성의 연구 인력이 본인의 전공을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는 만큼 HK사업을 통해 육성된 1.5세대 연구자들이 이 학문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지중해지역원은 연구 성과의 확산과 사회적 환원을 위해서 디지털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모바일과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들을 위해서 지중해 지역 정보를 담은 자체 웹페이지인 다국어지원지중해웹서비스시스템(Multilingual Mediterranean Web-service System, MMWS) 구축 및 운영, 지중해지역 정보의 모바일 서비스, 지중해 지식 정보를 담은 지중해지식문화지도(Mediterranean Electric Cultral Atlas, MECA, 현재 특허 출원 중) 제작 등 지중해 지식 정보의 디지털화를 적극 추진했다. 지중해 지역 정보를 연구자는 물론 일반인들과 공유하기 위한 시스템으로서 지중해 디지털 지역학(Mediterranean Digital Area Studies)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3단계 사업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부터 그 동안의 연구 성과와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아젠다와 부합하는 연구 성과들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문명 교류학에 대한 우리의 독창적인 해석과 이론도 제시하기 시작했다. 해외의 주요 지중해 연구 단체와 기관들이 지중해지역원의 연구에 관심을 보이고 공동 연구와 사업을 하자는 요청도 쇄도하기 시작했다. HK사업의 결과물로 제작하고 있는 저서(『지중해의 문명 교류』, 2017년 4월 출판 예정)에 해외 학자들이 참여하고 싶다는 요청이 잇달았고 현재 이들과 공동 저술중인 이 책은 곧 세상에 모습을 보일 것이다.
여기에 자신감을 가진 지중해지역원은 아시아의 지중해 지역 연구 단체를 하나로 모아 공동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단체로서 아시아지중해연구소연합(Asia Federation of Mediterranean Institutes, AFOMEDI)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지중해지역원의 요청에 일본, 중국, 대만, 터키와 이집트의 지중해지역연구 단체가 호응해 만들어졌고 2017년 3월에 한국에서 창립 총회 및 제1회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미국과 호주, 모로코 등 세계 각지의 연구자들이 이 대회에 참여를 요청해 왔다. AFOMEDI는 향후 아시아 지중해 지역 연구의 메카로 발전할 것이고, 궁극적으로 전 세계 지중해 지역 연구의 거점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 중심에 지중해지역원이 있을 것이다.
작지만 강한 연구소-지중해 디지털 지역학을 개척하다
숨가쁘게 지난 10년을 열심히 달려 왔다. 어려움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HK사업 10년을 통해 지중해지역원이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구성원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HK사업을 통해 지중해지역원이 얻은 가장 중요한 자산은 자신감이다. 국내에서의 지중해 지역 연구는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그 동안은 늘 지중해 지식의 소비자로서의 위치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HK사업을 통해서 지중해 지역 연구의 토대와 글로벌 네트워크 환경을 구축함에 따라, 우리도 지식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지식의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21세기 한국은 지식 소비국을 벗어나 지식 생산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10년의 기간 동안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소로 성장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해외 유수한 연구소와 경쟁할 수 있는 연구 기반과 토대는 굳건히 확보했고, 이미 그들과의 경쟁과 협력 관계는 시작되었다. 해외의 유수한 지중해 관련 연구 기관에서 공동 연구 요청이 잇다르는 것을 보면서 지난 10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지중해 지역 연구 분야에서 지식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자심감을 갖게 되었다. 향후 지중해지역원은 지중해 문명 교류학을 중심으로 선도적 지식을 생산하는 연구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지중해지역원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향후 지중해지역원은 지중해지역에 대한 지역 연구는 물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지중해지역을 중심으로 문명 교류 연구의 세계적인 허브 연구소로 발전할 것이다. 지중해지역원은 양적인 팽창보다는 질적 함양을 추구하며 지중해 문명교류학으로 특성화된 작지만 강한 연구소를 지향할 것이다.
지중해지역원은 전 세계 지중해 지역 연구자들을 위해 지중해 지역 정보를 생산ㆍ축적ㆍ공유하는 허브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지중해 지식을 공유하는 웹서비스 시스템(MMWS)도 한층 진화할 것이다. MMWS는 전 세계 지중해지역 연구자들을 위한 개방형 공간으로 발전할 것이며, 지중해 지역학의 디지털 허브가 될 것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 연구소 및 연구 단체와의 교류 협력을 통해 지식의 생산ㆍ발전ㆍ나눔ㆍ재생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그 중심에 지중해지역원이 자리할 것이다.
대학의 연구 성과는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지중해지역원은 디지털 서비스를 통한 지중해 지식과 정보의 공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좌 및 출판, 지역 풀뿌리 문화 단체들과의 공동 프로그램 운영, 지역 소외 계층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 지역원의 성과를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추진해 왔고, 향후에도 지속할 것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만큼, 지중해지역원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무도 다할 것이다. 21세기는 국가와 국경의 의미가 희박해 지고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며 전 지구촌의 구성원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 사회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직업을 찾아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직업 유랑민(working nomad)들이 이 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도 이미 다문화 사회에 접어 들었다. 단일 민족 사회를 살아왔던 우리로서는 새로운 경험이고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다문화사회의 경험을 이미 갖고 있는 지중해 지역 국가들은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며 대한민국호가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지중해지역원이 일조할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중해 문명 교류학을 주도하는 명실공이 세계적인 연구소로서,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연구소로 지중해지역원이 거듭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 대학과 정부 기관 등의 계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