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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S City_‘다름의 공존’, 그 숭고한 위험을 기꺼이 지키는 도시 트리에스테Trie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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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1,954 조회 날짜 24-07-0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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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의 공존’, 그 숭고한 위험을 기꺼이 지키는 도시 트리에스테Trieste


지중해지역원_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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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해안 절벽에 있는 마라마레Maramare 성과 정원>


트리에서테Trieste는 이탈리아 북동지역에 있는 도시로, 아드리하해의 북단에 위치해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를 접하고 있는, 유럽의 중남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트리에스테’라는 이름에 대한 다양한 유래 중 최근 지리학자 스트라보의 분석은 왜 이 지역이 다양한 역사와 문화 접경지대가 되어 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트리에스테는 Tergeste 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라틴어 Tegestum에서 파생되어 이후 Tegeste로 발음되었다고 한다. 라틴어 Tegestum은 ‘세 번 전쟁을 일으킨’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지정학적 위치와 풍부한 지대의 이점을 쟁취하기 위해 고대 로마 군대가 이 지역 세 번이나 차지하려 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 쌓인 항구 도시 트리에스테는 바다로부터 고지의 위치에 따라 기후가 다양해, 토질과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와인 재배를 위해 최적화된 토양을 지닌 곳이다. 다양한 지역이 접변되고, 절벽과 바다가 이어지는 지정학적 위치로 방어와 상업적 기능을 수행한 군사 전초지로 최적화된 곳이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프랑크 제국의 지배 하에 놓였고, 이후 인근 도시 베네치아와의 견제 끝에 자발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 치하로 들어간다.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에 이어,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았고, 시간이 지나 합스부르크, 나폴레옹의 지배 이후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이 도시의 지정학적 위치와 상업적 가치를 알아본 외세 열강들의 쟁탈전은 근현대까지 이어졌다. 제 1차 세계대전 때 상당한 영토를 받게 된 이탈리아는 1920년 트리에스테를 이탈리아로 합병했다. 합병 후 이탈리아 정부는 이 지역에 남아있는 다양한 인구와 문화를 ‘민족적 이탈리아화’를 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독일식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수정시켰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당시 거주인들은 이 도시를 떠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트리에스테의 지역적 이점을 차지하러 도시를 침공했으나, 이후 1947년 이탈리아와의 평화조약에 따라 이 곳을 자유 구역으로 놓아준다. 이후 트리에스테의 귀속문제를 두고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대치했고, 결국 1945년 합의한 모건 라인에 따라 A구역과 B구역으로 나누어, 양국이 배분해 국경을 분할하게 되었다. 트리에스테에 남아 있는 엉켜 혼재한 역사의 흔적은 지중해, 인간의 역사, 정체성의 프렉탈을 보여준다. 


리카르도Ricardo 아치가 세워져 있는 로마 성벽, 로마극장, 콘스탄티노플 제국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비잔틴 모자이크의 세인트 유스 성당,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 즐비한 도시의 경관, 이탈리아어, 슬로베니아어, 독일어가 통용되며 소수 언어로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그리스어, 헝가리어가 자유롭게 사용되는 다문화적 색채 등이 이탈리아 커피 수도로 알려진 트리에스테의 커피 향과 함께 도시를 채우고 있다. 다시 말해 커피 향 이면에 가려진 역사의 정신적 상처와 흔적, 경험, 변화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도시에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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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산 쥬스토San Giusto 성당 내부 비잔틴 양식 모자이크>


산을 배경으로 한 해안 도시 트리에스테에 대해 영국 여행가 모리스Jan Morris는 ‘고립된’, ‘양가적인’ 지역으로 묘사했다. 없어서는 안 될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 항구 도시로서의 명성은 100년 전에 사라졌고, 트리에스테는 느리고 우아한 쇠퇴 상태에 빠져, ‘달콤한 우울’ 상태에 놓여있다고 표현한다. 이곳은 역사와 문화의 충돌과 혼재를 안고 있다. 무장 경찰이 도시의 유대인 초등학교를 보호하고, 골동품 시장의 상인들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책을 판매한다. 유럽의 노동절인 매년 5월의 첫날, 슬로베니아 주민들은 1945년 유고슬라비아에 의해 도시가 해방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창문에서 붉은 공산주의 깃발을 휘날린다. 기념관에서는 군대가 수백 명의 이탈리아과 민간인을 체포하고 총살했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인정한다. 트리에스테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그들의 불안을 감추지 않는다. 불안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데서 오는 저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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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해안 절벽에 위치한 마라마레Maramare 성과 정원의 식물들> 


트리에스테의 대표 작가인 이탈로 스베보 Italo Svevo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와 함께 인간, 도시의 정체성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1923년 그의 소설 『제노의 의식La Coscienza di Zeno』에서 주인공을 흡연 중독을 끊지 못하는 신경증적 정신과 환자로 묘사하는데, 이는 트리에스테의 복합적 상태, 더 나아가 오늘날 인간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신경증이라는 것은 없앨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며,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인간의 감정 중 필요없는 것은 없으며, 그 감정을 어떻게 다른 감정으로 유연하게 풀어내어 해소할 지가 중요한 것이다. 공존하며 풀어나가는 방식은 없애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지 않다는 인식으로 받아들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외곽에 위치한 도시 트리에스테는 유사한 도시 베니스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가장 자리라는 느낌이 든다. 베니스, 제노바 등 이탈리아의 다른 주요 항구와 경쟁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며 주 산업인 조선업이 쇠퇴했고 인구가 노령화되었다. 이 곳이 과거 건설해 두었던 파이프 덕에 준설 작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견고한 항구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장점은 이탈리아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것의 중심이었던 것이 모든 것의 주변부’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자리로 물러서고 나서야 트리에스테는 비로서 제대로 중심을 ‘발견’하고 ‘관찰’하며 개념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행정지역 중 하나인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Friuli Venezia Giulia) 안에 주도로 알려진 트리에스테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작은 지역에 속하지만, 이 도시는 이탈리아어, 슬로베니아어 또는 모국어, 프리울리어로 표지판이 표시되는 다문화적 지역이다. 트리에스테를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럽화’된 도시로 묘사하는 것은, 이 도시가 가진 ‘개방성’과 ‘유연함’을 보여준다. 즉, 이탈리아의 한 지역으로써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애착을 고수하면서, 소수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공감 역시 저버리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숭고한 위험을 감수하는 역사적 유경험을 거듭한 트리에스테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탈리아영으로 합병된 지 얼마 되지 않고 이탈리아 민족성이라 불리는 고유의 색채가 적고, 국경과 접하는 지리적 주변부에 위치한 이유로 이탈리아내에서도 과소 평가 받고 있는 도시 트리에스테. 정신분석학자들을 끌어당겨 매혹시킨 도시였으며, 한 때 제임스 조이스가 거주지로 삼기도 했던 이 도시는 그야말로 예술적, 문화적 유산이 접경도시라는 위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고대 로마 건축물과 오스트리에 제국 시대의 건축물과 지중해의 어울림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도시는 축적되고 변모하는 ‘정체성’에 대한 개념을 재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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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산 실베스트로San Silvestro 성당>


20세기 후반부터 트리에스테는 다문화 다민족 정체성을 인정받은 국제적 가치를 지닌 예술적, 문학적 도시로 등극했고, 그 가치는 현재 들어서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 특히 가장 오래된 도시의 예배 장소 중 하나인 실베스트로 대성당, 유대교 회당, 세르비아 정교회 성삼위일체 및 산 스피리디온 사원은 이 도시가 얼마나 문화적, 종교적으로 용광로의 기능을 했는지 보여준다. 짐을 싣고 도심으로 들어가는데 이용되는 트리에스테 대운하는 수 많은 인종과 문화와 역사를 도시 안으로 이동시켰다. 노을이 지는 운하 위에 반짝이는 잔잔한 트리에스테의 반사체는 지워도 다시 새겨지는 우리의 역사의 각인처럼 보인다. 흔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흔적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흔적을 반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흔적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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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트리에스테 운하 CC BY-SA 4.0>


이런 이유 때문인지, 트리에스테는 특히 도시 규모에 비해 시민박물관이 즐비하다. 서양사의 이론을 체계화 시켰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의 기념비 주변에 자리잡은 시민 역사 예술 박물관(Civic Museum of History and Art), 시민 도서관 옆에 위치한 고대 유물 박물관(Museum of Antiquities), 동양 미술전시를 위한 박물관, 성과 무기고 시민 박물관, 조국 역사 박물관, 트리에스테 유대인을 핍박한 나치들의 물품과 집단 수용소 유물을 보관한 사바 시민박물관, 평화를 위한 시민 전쟁 박물관, 민족지학 박물관(Ethnographic Museum of Servola), 자연사 박물관, 해양 시민 박물관 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현대의 트리에스테 이름의 기원설에 포함되는 고대 로마 도시 테르게스테는 이 도시의 지정학적, 전략적 이점을 고려해 성벽을 쌓고 수로를 건설해 도시를 둘렀다. 이 시절 완벽에 가깝게 정비된 수로, 도로 건설 덕에 항상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리던 도시는 경제 발전이라는 열매도 자연스레 맺었다. 도로와 운하를 타고 밀려들어오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는 누가 기득권을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조화롭게 섞여 더 나은 새로움을 같이 만들어 내느냐로 이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 갔다. 


달라서 불안한 것이 아닌, 다름을 수용하는 역동적 설레임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글과 그림으로 정의되어 왔다. 이 도시가 ‘부두’로, ‘일기’로, ‘여자’로 다양한 이들에 의해 묘사되는 것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만남과 흩어짐, 기록, 섬세함의 정체성 때문이리라. 트리에스테 도시가 품고 있는 ‘다름의 숭고한 가치’는 무엇인가? 접경과 경계는 새로운 관계의 장소를 만들어 낸다. 같음과 다름이 뒤섞여 새로운 정체성을 생산하고 만들어내는 트리에스테의 모습은 인간과 문화가 기본적으로 서로 연결된 맥락적인 것이며, 상호적인 부딪힘은 새로운 상호의존적 관계를 만들어 냄을 보여준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불안’에  현안을 제공할 도시 트리에스테를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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