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Travel _ 지중해 난민이 갖고 있는 독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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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5,846 조회 날짜 19-06-04 16:44내용
지중해 난민이 갖고 있는 독일에 대한 현실과 환상 따라가기
이동화(지중해지역원 차세대연구원)
요즘 유럽은 난민 문제가 화두이다. 이전부터 유럽은 꾸준히 난민을 받았지만 지중해를 건너온 난민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현재 난민 중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시리아 난민들이다. 이 시리아 난민들은 터키를 통해 에게 해를 건너 그리스로 가서 독일로 향한다. 독일의 총리 메르켈 앙겔라가 독일이 모든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발언을 하자마자 더욱 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독일로 가기위해 국경에 몰려들었다. 이 몰려든 시리아 난민들은 특히 독일의 뮌헨에 쏟아졌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하에 나는 ‘무엇 때문에’ 시리아 난민들이 독일로 가려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글에서 이전에 했던 여행을 통해 뮌헨을 보여주고 그 느낌을 알려주려 한다.
<독일에서 가장 빠른 기차 InterCity Express>
체코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의 뮌헨(München)으로 갔다. 기차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유럽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국경을 넘는 순간 독일의 경찰들이 객실을 확인하며 들어와 승객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다녔다. 경찰이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신분을 증명해달라고 했다. 갑작스런 일이라 그런지 순간 멍 했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 차리고 여권을 보여주며 여행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나의 여권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의 여권에 찍혀있는 슈베핫 공항(Schwechat Flughafen)의 도장을 확인하고 나서야 여권을 돌려주며 “신분을 증명해줘서 고맙다”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확실히 동유럽 사람들이 서유럽에 와서 불법 체류를 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들었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국경 검문을 깐깐히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안녕하세요(Grüß Gott)! (보통 독일 인사말은 구텐 탁(Guten Tag)이지만 독일 남부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뤼쓰 고트(Grüß Gott)말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지역 방언이다.) 맥주 마시겠습니까?”라는 차량내 판매원의 말이 들려왔다. 물론 난 술을 마시지 않기에 거절하였지만 독일에 들어왔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어느 한 역에 도착했는지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와 영어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역에 정차하자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승차했다. 객실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해가 상당히 저물었다. 객실의 등이 켜졌지만 조금 어두웠다. 뮌헨까지 절반 정도 갔을까 한 독일 남성이 내가 있는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여기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물론 난 괜찮다고 말했다. 그 남성은 퇴근 길이었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고 조금 편안한 자세를 취하더니 잠시 눈을 붙였다. 난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해가 다 저물어 울창한 나무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창문의 유리가 거울 마냥 나의 모습을 흐릿하게 비추었다.
뮌헨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뮌헨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날은 어두워져 곧장 숙소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숙소를 찾기 위해 역사 외부에 있는 여행 상점에 들어가 뮌헨의 지도를 찾았다. 물론 영어로 된 지도도 있었지만 일부러 독일어로 된 지도를 집어 계산을 하려했다. 그러자 점원이 독일어로 된 것이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상관없다라고 말을 하자 계산해주었다. 지도를 펼치고 숙소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호스텔의 조그마한 창을 통해 본 독일의 야경>
한 호스텔에 들어갔다. 호스텔 안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난 일부러 성수기를 피해 여행을 계획하고 유럽에 왔지만 나와 같은 동양인 여행객이 많이 보였다. 난 예약을 하지 않았기에 방이 다 차있으면 어떻게 하지 하며 조마조마 했다. 다행이 남는 방이 있었기에 투숙을 할 수 있었다. 나의 방은 꼭대기 층에 있었다 그래서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지상층에는 술을 마실 수 있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계단 옆에는 외부에서 술 반입 금지와 도박 금지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뮌헨 중앙 역(München Hauptbahnhof)>
유럽의 겨울의 해는 상당히 일찍 지기 때문에 난 일찍 일어나 뮌헨을 둘러보기 위해 준비했다. 우선 뮌헨 중앙 역에 다시 갔다. 다양한 사람들이 보였다. 주민, 여행객,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들, 터키어를 말하는 터키계 이주민 같은 사람들 그리고 아랍 난민처럼 보이는 사람들...
횡단보도 건너편에 장신의 한 남성이 보였다. 그 남성은 종이에 커다란 글씨로 ‘배가 고픕니다(Ich bin hunger).’라고 적힌 큰 종이를 들고 무릎을 꿇고 말 없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독일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남성의 얼굴은 울상을 한 채, 배가 고파 금방이라고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구걸하는 사람을 한명 더 보았다. 이번에는 여성이었다. 아랍 난민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정색 차도르를 두르고 있었다. 그 여인은 맥도날드 종이 컵을 들고 컵안에 한푼 만이라도 넣어 달라는 듯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거리 모퉁이에는 보석 상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차도르를 두른 한 여인이 서서 상점 안의 보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석을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정처 없이 거리를 구경하며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길을 잃어 지도를 펼쳤다. 난 괴테 거리(Goethestraße)라는 곳에 있었다. 여기서 터키어가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터키어로 된 글이 간간히 보였다. 터키계 이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구역인 것 같았다.
괴테 거리를 빠져나와 다시 뮌헨 역으로 갔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갔다. 마리엔 광장(Marienplatz)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산책을 하거나 애완동물과 노는 모습 그리고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담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광장 인근에는 신 시청(Neues Rathaus)이 있었다. 몇 백년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겉은 몇 백년의 세월을 보여줄 지라도 내부는 현대식 인테리어로 되어있었다. 몇 백년된 건물이 이렇게 유지 되어 사용되어진 것이 나에겐 너무나도 신기했다.
<신 시청(Neues Rathaus)>
<바이에른 전통 복장을 한 음악가>
다시 마리엔 광장에서 더 걸어 들어가니 영국 정원(Englischer Garten)이 나왔다. 이 영국 정원은 미국 출신의 영국인 물리학자 벤자민 톰슨의 조언으로 바이에른의 선제후 칼 테오도르(Karl Theodor)가 이자르강(Isar) 북쪽에 있는 늪지대를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바꾸도록 명령을 내려 1790년에 영국 정원이 조성되었다. 그 정원 입구의 앞의 넓은 공간에는 3개의 거대한 동상이 있었고 정원 입구 옆에는 한 남성이 바이에른(Bayern) 정통 복장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정말 흥겨운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단순 거리의 악사가 아닌 시 소속의 음악가인 것 같았다. 그의 앞을 한 노부부가 지나가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나와 같은 여행객 인 것 같았다. 노부부 중 남편이 브라보라고 외쳤다. 그러자 노래를 부르던 사람은 그 우렁찬 목소리로 “감사합니다(Danke Schön)!”이라고 말했다. 사실 영국 정원, 이 구역은 독일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열리는 장소 중 하나다. 하지만 10월이 한참 지난 2월이어서 그런지 매우 한산했다. 하지만 바이에른의 전통 복장을 입고 노래하는 사람 덕분인지 이 한산한 분위기에도 난 옥토버페스트의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난 이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평온한 조용함이 흐르는 주거지나 나왔다. 난 이 조용한 주거지를 둘러보았다. 주거 건물들이 조금식 달랐을 뿐 일관성 있게 보였다. 주거지에 한 학교가 있어 가 보았다. 철학 단과 대학교라고 적혀있었다.
<철학 단과 대학교(Hochschule für Philosophie)>
창문에는 세미나 홍보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중년의 여성 둘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주거지에서 처음으로 독일 사람을 보았다. 그런데 이 두 명의 여성은 서로에서 속삭이 듯이 말하고 있었다. 난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서로에게 “저 사람에게 ‘니 하오’라고 말해봐”라며 말하고 있었다.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동양인은 처음 본 것 같았다. 난 속으로 웃었다. 동양 사람이 서양 사람을 쉽게 구분 할 수 없듯이 서양 사람들 눈에는 동북아시아 3개국의 사람이 비슷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뮌헨 개선문(Siegetor)>
어느덧 뮌헨의 끝에 와 있었다. 그곳에는 뮌헨 개선문(Siegetor)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도로가 깔려있어 차량들이 오가고 했다. 이 개선문은 루트비히 1세가 보불 전쟁에서 용감히 싸운 바이에른 왕국의 병사들을 찬양하기 위해 건축한 것으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떠 10년 동안의 공사 끝에 1834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개선문에는 ‘바이에른 군대에게(dem bayrischen Heere)’라는 글귀가 조각되어 있었다. 이 개선문 인근에는 독일에서 2번째로 큰 대학인 뮌헨 대학교(Ludwig-Maximilian Universität München)가 있었다. 이 대학교는 원래 뮌헨의 북쪽에 있는 잉골슈타트(Ingolstaat)에서 1472년, 잉골슈타트 대학교로 개교를 했다 하지만 1800년 잉골슈타트 남동쪽의 란츠후트(Landshut)로 옮겼졌다가 1802년, 바이에른의 왕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1., 1756 -1825)의 이름을 따 막시밀리안 대학교로 개명 되었다. 하지만 또 다시 루트비히 1세(Ludwig 1.)에 의해 이 대학교는 뮌헨으로 옮겨졌고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로 개명이 되었다. 난 뮌헨 대학교로 곧장 갔다. 그곳에 가니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에는 빠른 걸음으로 대학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특히 중국인 유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독일에서 유학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내심 그들이 부러웠다.
<뮌헨 대학교(Ludwig-Maximilian Universität München)>
<뮌헨 대학교 도서관 입구>
<뮌헨 대학교 입구>
다시 뮌헨 역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점심 때가 되었는지 손에 먹을 것을 들고 걸으면서 음식을 먹는 사람이 간간히 보였다. 난 뮌헨 역사 안에 있는 여러 개의 가게 중 한 빵가게에 들어가 칠면조 가슴살이 들어간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웠다.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1세(Ludwig 1., 1786 - 1868)>
난 다시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지도에서 왕의 광장(Königsplatz)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향했다. 왕의 광장으로 가는 도중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1세와 선제후 막시밀리안 동상이 있었다. 동상은 무언가를 지휘하는 것 같았다.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Kurfürst Maximilian, 1623-1651)>
선제후 막시밀리안은 다양한 개혁을 통해 바이에른의 재정을 개편하여 바이에른을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루트비히 1세는 바이에른 왕국의 문화를 높이 끌어올린 사람이다. 건축물 세 채와 드넓은 광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왕의 광장에 도착한 것이다. 진정한 광장(廣場)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 드넓었다. 3채의 건축물 중 왼쪽의 건축물 앞에는 아테나 동상이 있었고 그곳에서 그리스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었는 것을 보니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하는 것 같았다. 중앙은 개선문과 같이 중앙이 뚫려 있었다. 오른쪽 건축물의 계단 앞에는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었고 날씨가 화창했던 탓인지 계단에는 연인들이 앉아 햇살을 쬐거나 가지고 온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왕의 광장을 뒤로 한 채 다시 뮌헨 중앙 역으로 갔다. 뮌헨 중앙 역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난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가 마찬가지로 빵과 치즈 그리고 물을 샀다. 빵을 살 때, 계산하는 줄 가장 앞에 있던 한 중년의 남성이 계산을 끝내고 점원에게 터키어로 “감사합니다(Teşekkür ederim).”라는 말을 했다. 점원이 터키계 이주민인 것 같았다. 물건을 계산하고 가게들을 둘러보니 터키계 이주민으로 보이는 점원들이 몇몇 보였다.
<카우핑어 거리(Kaufingerstraße)>
다음날, 난 독일의 자랑이자 바이에른의 자랑 중 하나인 BMW(Bayern Motoren Werke) 본사를 방문했다. BMW본사에 가기 위해서는 전차(S-Bahn)을 타야하기 때문에 마리엔 광장과 멀지 않은 카우핑어 거리(Kaufingerstraße)로 갔다. 마리엔 거리로 가는 도중 어제 보았던 구걸하는 아랍 여성을 보았다. 그 여성은 어제와 달리 노래를 부르며 구걸을 하고 있었다.
전차를 타고 종점에 도착하니 BMW본사가 보였다. 난 빠른 걸음으로 BMW본사에 들어갔다. BMW본사에 들어가는 나 이외에 상당히 많은 중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 관광객이 많이 있었다. 표를 BMW 박물관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나 또한 줄을 서 표를 샀다. 국제학생증을 제시하니 표값을 할인 해주었다.
<BMW 본사(Bayern Motoren Werke AG)>
<BMW 차량들>
박물관 안에 입장하니 먼저 와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가져온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 BMW사의 역사와 함께 수 많은 차량과 오토바이들이 전시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어린이도 있었지만 모두가 어린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BMW는 원래 항공기 엔진을 제조하던 회사 그렇기에 BMW사의 문장은 항공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모습을 본뜬 것이다.
여서 그런지 차량 전시장 이외에 항공기 엔진 전시도 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두 독일 남성이 항공기 엔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BMW사가 영국의 자동차 회사인 롤스로이스와 미니를 인수해서 그런지 롤스로이스와 미니 전시장도 있었다. BMW 박물관에는 차량을 시승해 볼 수 있는 공간도 있있었다. 여기에는 BMW 자동차와 더불어 오토바이 그리고 미니가 있었다. 한 독일 꼬마 아이가 “이야 죽이는데(Das ist genial)!”라고 말하고 뛰어다며 차량에 타는 모습이 보였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앞다퉈가며 차량을 시승해보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독일을 꿈꾸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지 않을 까 생각했다.
BMW 박물관을 다 둘러본 뒤 BMW사 옆 맞은편에 위치한 올림피아 공원에 갔다. 여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호수가 있었고 사람들 사이에 많은 새들이 무리를 지어다녔다. 새가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독일 사람들은 정말로 산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독일어를 배울 때 예문으로 산책하다/산책하러 가다(spazieren/spazieren gehen)가 상당히 나왔는데 이제야 왜 그런지 이해가 갔다. 공원을 걷는 도중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는 사실 어제 눈이 온다고 했는데 오지않고 오늘 내렸다. 독일의 일기예보가 정확성이 좀 떨어진다는 것으로 들었는데 사실인 것 같았다. 얼마가지 않아 눈이 더욱 많이 내리기 시작해 BMW 박물관으로 돌아가 눈을 피했다. 눈이 어느 정도 멎자 전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전차에서 아주 연로한 독일 할머니를 보았다. 손수건에 액체를 묻히더니 가방을 닦고 있었다. 복장이 외국 영화에서 나오는 40년대 할머니의 모습 같았다. 카우핑어 거리에 도착하자 난 뮌헨 중앙 역에가 내일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는 기차 표를 미리 끊었다. 숙소로 돌아서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머물때 나에게 아주 친철하게 대해준 호스텔 직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일상에서 벗어났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곳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 것 일까, 난 여기서 한번즈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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