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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S Travel _ 2013년 여름, 그리스 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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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4,901 조회 날짜 19-05-3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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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2013년 여름, 그리스 여행의 추억


고려대 사학과 김경현



고상한 여가 (otium cum dignitate)


 ‘고상한 여가’ 혹은 ‘품위 있는 휴식’. 마치 오늘날 어느 전문여행사의 광고 카피처럼 들리는 이 표현은 로마 공화정 말의 문인 정치가 키케로가 한 연설문에서 썼던 것이다. 자신처럼 나랏일(res publica)에 종사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권할만한 고상한 삶의 방식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정무에 몰두하다가 모처럼 시골 별장에서 ‘휴가’(otium)를 갖더라도, 그 휴식은 나랏일로 되돌아가서 활용할 지혜를 얻는, ‘품위를 갖춘’(cum dignitate) 것이면 좋겠다는 취지였다. 키케로의 몇몇 대화편이 보여주듯, 그 자신은 종종 그리스 출신 저명 지식인을 포함한 ‘친구들’과 함께 별장에서 철학적 담론을 즐기곤 했다. 그가 보기에, 그런 고상한 여가야말로, 자신 같은 엘리트 시민과 평생 ‘개인사업’ (negotium)에나 마음을 쓰는 사람을 구별하는 국면이었다.

  

지난 8월의 그리스 여행은 내게 그런 ‘고상한 여가’ 같은 것이었다. 물론 키케로라면, 연구와 교육, 말하자면 ‘개인사업’에 평생 몸 바쳐 온 필자의, 이런 표현남용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굳이 이번 여행을 그렇게 보고 싶은 까닭이 있다. 여섯 번째의 이번 그리스 여행은, 애당초 전과 같은 강행군의 답사보다 한가한 여행으로 구상되었다. 말하자면 고대사 연구자로서, 내 전공사업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냥 한 여름 그리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otium) 해보려 했던 것이다. 


그 선택에는 여행 동료였던 철학과 L교수의 영향이 컸다. 그는 독일 근대철학 전공자지만, 나보다 한술 더 뜬 ‘그리스 매니아’(philhellenist)로, 그리스 철학은 물론 역사,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벌써 몇 차례 그리스 여행에 동행한 터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 관한 한, 그는 전보다 좀 ‘품위 있는’ 여정을 고집했고, 그래서 사적지는 여정에서 대거 탈락했다. 에그나티나(Egnatia) 고속도로를 따라 북부를 횡단해보자는 구실로, 요아니나와 테살로니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는, 기원전 2세기 로마가 마케도니아 왕국을 합병하고 건설한, 동지중해 방면으로 뻗어가던 로마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나는 무엇보다 그 도로의 종점인 테살로니키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L교수가 추천한 품위 (dignitas) 아이템은 휴양지 코르푸(Corfu) 섬으로, 11일 여정에 최소한 4일을 그 섬에서 빈둥거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타협은 내겐 내심 즐거운 것이었다. 코르푸는 고대에 케르키라라 불렸으며, 투키디데스의 『역사』에 의하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단을 제공한 곳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그 섬 건너편의 이구메니차 항구는 사실상 에그나티나 고속도로의 출발지였다.        

          

코르푸 섬의 추억


이번 그리스 여행도 아테네가 출발점이었다. L교수는 올 여름 그곳에서 열린 세계철학자 대회 참석차 먼저 아테네에 와 있었고, 나는 그 대회가 끝날 무렵 아테네에 도착했다. 우리의 여행 계획은 가급적 지체 없이 코르푸 섬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약 7시간이 소요되는 아테네에서 요아니나까지의 멋진 버스여행을 단념하고, 아침 비행기를 탔다. 그래도 코르푸 섬 건너편의 이구메니차 항구에 도착한 것은 거의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그 날, 단조롭고 무료해 보이는 그 작은 항구 도로변의 허름한 호텔에 머문 것은 그저 코르푸로 들어가는 배편이 다 끊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짐을 풀고 항구를 감싸듯 조성된 인공 방파제 쪽으로 한 시간여 산책을 할 무렵, 보잘 것 없어 보이던 그 항구도시가 순식간에 환상적인 풍광을 연출했다. 해거름에 가로등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때맞춰 산보하러 나온 주민들이 늘어나자, 바다 쪽에서 미풍이 불어오는 산책로, 그리고 저 편에 펼쳐진 항구는 아주 다정다감한 풍광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체험이 아니었다면, 이구메니차는 여행객이 잠시 거쳐 가는 낯설고 삭막한 항구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여행객의 시선은 늘 이처럼 기만적이기 십상이다.


코르푸 섬에서는 여러 날을 섬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코르푸 타운 한 가운데의 호텔 아르카디온에 머물렀다. 사실 애당초 계획은 섬의 반대편 해안, 그러니까 이오니아 해에 연한 휴양지의 호텔 에르모네스 (Ermones)에도 이틀간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에르모네스에 당도한 후, 한적한 해변을 선택한 모험은 큰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그 호텔은 전혀 투숙객을 맞을 상태가 아니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주인은 거의 멘탈 붕괴 상태였고 (숙박부는 아테네 진학 준비하는 중이라는 어린 아들이 대신했다), 종종 혼잣말처럼 무어라 큰소리를 질러내곤 했는데, 우리에게 배정된 방에 들어서고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호통소리는 일하는 단 한분의 아주머니를 향한 것으로, 행동이 굼뜨다는 뜻이었다. 사실 침대보, 화장실 휴지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에어콘과 티비의 리모콘은 모두 건전기가 녹슬어 거의 작동불능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파견된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대로 얼굴에 노여움과 불만이 가득했고, 그 큰 호텔을 혼자서 다 감당하저니 그럴만했다. 


한적한 해변 휴양의 환상을 산산조각 낸 그 황당한 사태에서 도망치듯,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와 해변가를 향했다. 도중에 우리는 호텔의 무정부상태, 아니 주인의 멘탈 붕괴를 설명해줄 것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근처 산의 비탈 위에 아주 최근에 개장한 것 같은 고급 콘도미니움의 대규모 단지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호텔 주인의 투자를 물거품으로 만든 주범일 것이라 짐작되었다. 부동산 거품의 참상과 충격은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분명했다. 어쨌든 우리는 하루 숙박비를 포기하더라도 견딜만한, 코르푸 타운의 호텔 아르카디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르카디온은 시설보다는 주로 그 위치 때문에, 새벽, 낮, 저녁마다 다른 매력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깊은 인상으로 남는 것은 호텔 근처 카페의 한 낮의 풍경이었다. 호텔과 시청 사이에는 공원의 나지막한 숲과 나란히 18세기 유럽풍의 건물들이 길게 줄지어 있고, 숲과 건물들 1층 아케이드에 카페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는데, 우리는 매일 한 낮이면 그 카페에서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면서 ‘고상하게’ 몇 시간씩 보내곤 했다. 적어도 내게 그 한 낮은 기이한 즐거움의 시간이었다. 뜨겁게 포도에 작렬하는 태양, 굉음 같은 숲 속 매미소리, 카페 앞 거리를 마치 전시장처럼 오가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내가 마치 그 정물화를 관조하는 듯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때의 ‘어지럼증’에는 묘한 쾌감이 뒤따르곤 했다. 새벽의 즐거움은, 곧 여름 그리스 여행의 큰 기쁨 중 하나로, 우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일 호텔 근처 해변으로 해수욕을 갔다. 하루 중, 그리스의 자연과 그리스인의 특권에 대한 부러움이 가장 고조되는 때였다.

      

코르푸 섬에 머무는 동안, 하루 오후 나는 L교수를 떼어놓고 개별행동을 했다. 내 고집 혹은 직업병 때문이었는데, 호텔에서 얻은 코르푸 섬 홍보물에서 아킬리온 (Achilleion)이란 지명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발동한 탓이었다. 혹 그곳에 호메로스 서사시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사당이 있지 않을까? 기원전 7세기 이래 고대 그리스 곳곳에는,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을 모신 사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가령 지금도 스파르타에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된 헬렌의 남편 메넬라오스 왕의 ‘사당’(Menelaion)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L교수를 남겨두고 혼자 버스를 타고 코르푸 타운에서 약 4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그곳을 찾았다.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곳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세푸스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노년에 지은 별궁으로, 훗날 그리스 정부가 인수해 현재의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그림 1과 2) 황비는 고대 그리스 문화, 특히 호메로스 서사시에 매우 심취했고, 그래서 자신이 지은 궁전의 구석구석을 서사시 영웅들의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했다. 궁전 2층 중앙 계단에서 마주 보이는 궁륭 아래 벽면은, 아킬레스가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는 대형 유화가 가득 차 있으며 (그림 3), 궁 입구의 철문 상단은 아킬리온이라는 현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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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오스트리아 황비 엘리자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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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아킬레이온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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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아킬레이온 궁의 벽화. 아킬레스와 헥토르> 


요아니나의 천사, 안티고네 


코르푸에서 4일을 그렇게 고상하게 보낸 뒤, 우리는 다시 그리스 본토에 상륙했다. 코르푸 섬과 이구메니차 항구를 오가는 동안, 뱃전에 서서 우리는 그 길쭉한 섬 코르푸와 본토 사이의 작은 해협이, 이탈리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항로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지점임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림 4) 난바다로 유명했던 섬 바깥의 이오니아 해와 달리, 그 해협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잔잔했다. 스파르타의 최대 동맹국이자,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에 다수 식민시를 개척한 코린토스가, 항로의 중간 지점인 코르푸 (케르키라)를 식민화한 것, 그리고 그곳에 아테네의 개입을 참을 수 없어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세 이후 해상제국 베네티아가 그 섬을 장악한 뒤, 수차례에 걸친 오스만 터어키의 공격을 총력을 기울여 막아낸 것 역시 그 섬의 전략적 중요성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오스만 터어키의 지배를 받은 본토와 달리, 그 섬이 마치 로데스 섬처럼 지금도 강한 유럽문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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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코르푸 섬과 그리스 본토>


본토에서 우리의 첫 숙박지는 요아니나였다. 그 곳은 아테네와 테살로니키 다음 가는 대도시로, 옛날 에피루스 왕국의 이름을 딴 현 행정지역의 중심이기도 하다. 핀도스 산맥의 한 자락으로 보이는 웅장한 산 아래 큰 호수가 형성되어 있고, 요아니아는 바로 그 산과 호반을 따라 길게 발달한 도시였다. (그림 5) 우리는  인터넷의 호텔예약 전문 사이트(Booking.com)를 통해, 호반 북쪽의 페라마라는 곳에 호텔을 예약해놓은 터였다. 그러나 요아니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그곳에서 우리의 일정은 전부 달라졌다. 그리스 고전에서 읽었던 저 ‘낯선 자에 대한 환대’(philoxenia)를, 뜻하지 않게 직접 체험하게 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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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요아니나 호수> 


그 날은 마침 성모승천일(St. Mary's Assumption Day)이었다. 큰 공휴일이어서인지 길에는 대중교통은커녕 인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무작정 버스 정류장을 찾아 헤매던 우리는 한 교회 앞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우리의 고충을 듣자마자 아주머니는 잠시 여기저기 탐문하다 돌아오더니, 놀라운 제안을 했다. 페라마까지 약 15분 거리이니, 자기 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여행가방을 끌고 한 시간 남짓 헤매던 터라 그 제안을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아주머니의 이름은 안티고네였으며, 70대 초반이지만,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였다. 청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받쳐 입어 다소 남성적인 외모에, 무엇보다 그 특유의 활력 때문인 듯했다. 그 활력은 정말 거역하기 힘들어 페라마 호텔로 가던 차 속에서 우리의 여정을 다 바꾸어 놓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우선 숙소를 호반 서쪽에 있는 터어키 성 근처로 바꿀 것을 강권했다. 그리고 예악한 페라마의 호텔에 도착해서는, 우리 대신 호텔 주인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더니 결국 그 뜻을 관철했다. 그 다음에 나온 아주머니의 ‘강요’가 환대의 압권이었다. 그 날이 공휴일인 것을 뒤늦게 안 터라, 우리는 사실 요아니나에서의 오후 일정을 거의 단념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럴 수 없는 일이라면서, 우리에게 유적지 도도니와 기암절벽이 있는 관광명소 자고리 계곡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우리는 후자를 택했고, 해질 무렵까지 서너 시간 아주머니의 가이드를 받으면서 자고리 계곡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그림 6) 그날 저녁 우리는 그 아주머니가 성모승천일에 잠시 내려오신 천사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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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자고리 계곡의 안티고네> 


천사 안티고네는 그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를 찾아 오셨다. 호반 근처의 터어키 성 (그림 7)과 요아니나 시내를 안내해주기 위해서였다. 아침 산책과 답사 때, 우리는 그녀가 20세기 초에 불가리아에서 귀향한 이산 그리스인의 후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평생 요아니나 시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퇴임 후, 아테네에 정착했지만, 옛 친구들을 만나러 요아니아에 잠시 들른 것이라 했다. 작별 선물로 (그것이 바로 그리스 식 환대의 휘날레이다!) 그녀는 바싹 말린 오레가노 한 다발이 담긴 비닐봉지 하나씩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같은 여행객에게 그것은 참 애물 같은 존재였지만, 그 천사의 성의 어린 ‘선물’을 도중에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남은 여정 동안 오레가노 가지들을 훑어 작은 병에 담는 것이 저녁 일과가 되었다. 그리스인 ‘환대’의 향기가 가득한 그 허브는, 역시 그녀가 권해서 사온 샐러드용 올리브기름 (아우렐리오)과 함께, 지난 가을 우리 집 아침 식탁의 주요 식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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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요아니나 터어키 성의 이슬람 사원> 



에그나티아 가도의 종점 테살로니키


우리는 요아니나를 떠나 피혁제품 특산지로 유명한 카스토리아에 하루 머문 뒤, 서둘러 테살로니키로 갔다. 그 여정은 에그나티아 고속도로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핀도스 산맥을 관통하는 동안, 수십 킬로에 달하는 터널이 몇 개인지다 세기 힘들 정도였다. 그 터널 지역을 지나면서, 로마인이 개착한 에그나티아 가도는 어떻게 그 산악지역을 통과했을지 몹시 궁금했다. 핀도스 산맥을 지나면서부터는 고원의 광활한 초지가 펼쳐졌다. 남부 그리스의 올리브 숲을 대신하는 인상적인 그 풍광은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카스토리아가 왜 피혁제품 산지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옛날 테살리아 지역이 어째서 명마와 켄타우로스 족의 신화로 유명했는지 등등. 또한 역사적으로 남부 그리스에 도시국가(polis)가 발달한 것과 대조적으로 북부에는 어째서 부족들(ethne), 혹은 기껏해야 느슨한 부족연맹체 정도가 대세였는지 이해할만 했다. 


테살로니키에서 우리는 4일을 보냈다. 이번에도 나는 하루 만은 L교수를 남겨두고 테살로니키 근방의 유적지 베르기나에 혼자 다녀올 계획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친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테살로니키에서 약 시간 반쯤 되는 거리였다. 주말이어서 버스 운행편수가 적었고, 그래서 하루 안에 왕복이 불확실한 게 문제였지만, 여차하면 택시로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임 교수에게 양해를 구한 터였다. 하지만, 작전 당일, 새벽 잠자리에서 몸 한구석이 불편하더니 아침이 돼서도 여전했다. 결국 나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뒹굴어야 했다. 그 사이 L교수는 홀로 테살로니키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위치, 다채로운 메뉴의 식당들에 대한 고급 정보를 한 가득 가지고 돌아왔다. 참으로 그에게 민망한 하루였다. 


테살로니키 시의 구조는 아주 단순했다. 항구에 연한 해변도로와 평행하게 몇 개의 도로들이 도시를 관통하고, 철도역과 시외버스정류장, 그리고 공항이 그 간선 도로 양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해변도로 변에는 카페들이 즐비해, 그 도시 젊은이들과 여행객들이 모여 축제 분위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도로의 중간 지점에 넓은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이 있고, 거기서부터 내륙 쪽으로 널찍한 중앙로가 뻗어있다. 당연히 도시의 최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대학 등이 모두 그 중앙로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점은 고대에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니, 갈레리우스의 궁전과 개선문, 로마식 포룸 등이 모두 그곳에 밀집해 있었다.    


이번 테살로니키 방문은 처음이 아니었다. 20여 년 전쯤 답사팀과 함께 버스를 타고 터어키로 이동하던 중 잠시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너무 일정이 빠듯했고, 무엇보다 그 도시에 얽힌 역사를 잘 몰라, 사진을 제대로 남기지 못해 늘 아쉽던 터였다. 이번에는 특별히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문과 궁전 단지를 찬찬히 살펴보고 싶었다. 내 기회는 이른 아침식사 후, L교수와 함께 일정을 시작하기 전, 개별행동이 가능한 한 두 시간 동안이었다. 다행히도 투숙한 호텔과 궁전 단지는 지척이었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네 사람 (두 명의 황제와 두 명의 부황제)이 나누어 통치하는, 소위 ‘4인공치제’(tetrarchia)를 창시한 디오클레티아스 황제의 사실상의 상속자였다. 4인공치제를 주도한 것은 늘 동쪽 황제였기 때문이다. 그의 치적 중에는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도와 기독교 대박해를 주도한 일이었다. 그러나 종국에 그 박해가 오히려 사회혼란을 가중시키자,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 그는 서둘러 기독교 관용칙령을 내렸다. 비록 이 칙령은 콘스탄티누스의 소위 ‘밀라노 칙령’에 가려 빛을 잃었지만, 기독교 승리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였다.


또 한 가지 위업은 그 전, 그러니까 그가 아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황제로 있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는 대외관계에서 계속 실패를 거듭하던 그 위기의 시절, 아주 예외적인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 나르세스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테살로니키의 개선문은 그 승전을 기린 건축물이었다. (그림 8)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 로마에 세운 개선문을 제외하면, 그것은 제정 후기에 세워진 거의 유일한, 그리고 가장 동쪽에 위치한 개선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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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테살로니키의 갈레리우스 개선문> 


개선문 아치의 안쪽에는 갈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 왕 나르세스를 공격하는 모습을 담은 부조, 그리고 바로 그 아래 칸에 당시 제국을 다스리던 ‘네 통치자’(tetrarchoi)를 그린 부조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림 9) 네 명은 다름 아니라, 동쪽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부황제인 갈레리우스 자신, 그리고 서쪽을 다스리던 황제 막시미아누스와 부황제 콘스탄티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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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갈레리우스 개선문 아치 안쪽의 부조> 


개선문에서 길을 건너 해변 쪽을 향해 약간 걸으면 궁의 폐허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 바 ‘갈레리우스 궁전’이다. (그림 10) 아마 개선문에서 시작되는 궁전 단지는 해변 가까이 세워진 로툰다까지 이어졌으리라 짐작된다. (그림 11)로툰다는 다분히 수도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케 하는 원형구조물로, 애당초 갈레리우스의 영묘로 기획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림 12) 그러나 정작 갈레리우스의 유해는 그의 고향 세르디카 (오늘날의 불가리아의 소피아) 근처에 묻혔다. 이 궁전 단지 전체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 무렵 황제들은 여러 곳에 별궁을 지었으며, 테살로니키의 궁전은 그 중 하나였을 뿐이다. 갈레리우스는 선임 동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처럼 주로 니코메디아 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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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갈레리우스 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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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갈레리우스 궁전 단지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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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테살로니키 항구 근처의 로툰다>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은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과 함께, 그리스 여행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테살로니키와 그 주변 일대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보여준다. 베르기나의 필리포스 왕묘를 찾지 못한 이번 여정의 아쉬움을, 박물관의 다소 빈약한 유물과 박물관 진입로에 세워진 필리포스 왕의 동상을 보는 것으로 달래야 했다. (그림 13) 또 박물관 소장품 중에서 의미 있는 그림 하나를 얻었다. 디오니소스 신에게 ‘내 소원을 들어주소서!’라는 탄원의 뜻을 담아 바친 봉헌물의 사진인데 (그림 14), 나는 거기에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라는 내 나름의 뜻을 담아, 당분간 화두로 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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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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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디오니소스 신에의 기도  “내 소원을 들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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