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Travel _ 이집트의 기독교도 콥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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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6,941 조회 날짜 19-05-30 13:14내용
이집트의 기독교도 콥트인
부산외대 아랍어과 김달준(bestkid88@naver.com)
대개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사실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나라이다. 그 국민의 10%인 1200만명 가량이 기독교도, 즉 콥트(Copt)인이기 때문이다. 콥트인의 기독교는 카톨릭이나 신교가 아니라 정교(Orthodox)이다. 콥트라는 말은 아랍어의 ‘깁트’를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아랍어로 ‘깁트’는 이집트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이집트를 바르게 이해하자면 콥트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직 한국에는 콥트에 관한 자료가 없다. 교회 및 선교 관련된 사람들이 논문 위주로 외국 서적을 일부 번역한 요약본이 전부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2012년에 ‘무슬림의 무구(無咎)함 (Innocence of Muslim)’ 이란 영화가 나왔는데, 무슬림들은 이 영화의 내용이 모하마드와 무슬림을 조롱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더구나 이 영화의 제작자가 이집트 기독교(Copt)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영화로 인해 기독교도와 반미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집트 기독교인들의 궁한 실정이 인터넷 뉴스에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나는 운 좋게 이집트 카이로로 가게 되었고, 이 글은 그 때 본 것들 중 감명 깊었던 것들을 요약한 것이다.
현재 이집트에는 수천 개의 교회에서 예배가 열리고 있으며, 콥트 정교회 신도 수는 20세기 후반기부터 증가세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이집트 콥트 정교회는 아프리카 각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근거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일부 콥트정교회 신도들은 이집트 이슬람 정부의 차별을 피해 미국, 호주 등으로 이주해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해 살고 있다.
1. 카이로 종합버스터미널 근처 작은 교회
이집트 콥트 교회를 찾으러 다니다가, 제일 먼저 들린 곳은 종합버스터미널(트룩 오만) 주변 시골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콥트 교회였다. 깊숙히 내부로 들어가보니, 한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문 앞을 가로 막으시며, 방문 이유를 물으셨다. 보아하니, 교회의 관리인이였다. “이집트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다. 구경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나요?” 조심스레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하시고는 나를 데리고 교회 이곳 저곳을 안내해 주셨다. 모든 콥틱교인들은 항상 반갑게 웃으며 친절을 베풀었던 모습이 인상에 강하게 남았다.
교회를 구경하는 도중 수많은 콥틱 아이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동양인의 방문에 신기했던 것이다. 자꾸 말을 걸고 만지고, 장난치는 영락없이 순수한 시골 아이들이였다. 아이들의 손목에는 너도나도 할거 없이 모두가 콥트교인의 상징인 십자가 문양을 새기고 있었다.
이 전통은 과거 이슬람 시대의 통치자가 교인들의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달고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 벌로 무거운 십자가 목걸이를 만들어 달도록 하였다고 한다. 십자가 목걸이가 너무 무거워 콥틱교회 교인들의 목에는 항상 파란 줄 자국이 있게 되었다.
어느날 왕이 혼자 일하는 콥틱인을 보고 “왜 무거운 목걸이를 빼놓고 일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콥틱인은 “사람은 안 볼지라도 하나님은 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에 감명을 받은 왕은 무거운 십자가 목걸이를 빼라고 명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콥틱인들은 목에 난 파란 줄 자국을 마음속에 간직하고자 팔목에 십자가 문신을 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데리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콥틱어로 쓰여진 성경책을 보여주었다. 약 2000년전 언어인 콥틱어를 아직도 사용 하고 있었다. 7세기경에 들어온 아랍어가 국어인 공식 언어가 된 후부터 지금까지도 그들의 언어인 콥틱어를 예배시간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콥틱어로 된 성경을 먼저 읽고 기도를 한 후, 아랍어로 번역하여 다시 읽는다고 한다. 이집트 원주민들인 그들은 아직도 그들의 콥틱 언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 시키는 것이다.
예배는 일주에 3번 모여서 드리는데 금요일은 예수님의 죽음을, 일요일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고, 수요일은 유다의 배신을 기억하기 위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예배 시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성찬식이 있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는 누구나 9시간 이상 금식 후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시간에는 향을 피워 기도가 하늘에 상달하도록 하는 것과 예배 마지막에는 성직자들이 성도들에게 물을 뿌리고 성도들은 그것을 소중히 몸에 바르는 성결 예식을 행한다. 까불며 장난치던 아이들도 예배당에 들어오면 숙연해지는 모습을 보며, 이들이 얼마나 예배당에 신성함을 지키고 있는지 엿 볼 수 있었다.
2.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가> 교회
이집트에서 제 2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로 발걸음을 돌렸다. 알렉산드리아는 희랍,로마 세계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고, 가장 선진문명을 자랑하는 문화도시였다. 그 곳에 아주 유명한 ‘성 마가 교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교회에는 ‘마가의 두개골’이 안치되어 있다. 계단 밑에 그것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콥틱 교회는 극단의 보수적 교회로서 교회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구분되어 있었다. ‘마가의 두개골’은 지성소 안에 있고 지성소는 일반 성도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지성소 안에는 커다란 성화 앞에 3개의 상자가 놓여 있는데, 양쪽 긴 상자에는 유명한 교황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고, 가운데 상자에 ‘마가의 두개골’이 있다고 한다. 이집트 ‘콥틱교회’에서는 로마 교회와 달리 베드로가 아닌 마가를 ‘초대교황’으로 추론하였다.
제2대 교황은 마가의 제자였던 ‘아니아누스’이다.
전통에 의하면 마가는 애굽 북서쪽 리비아 국경 근처에 있는 ‘펜타폴리스 태생’인데, 그의 아버지 때에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으며 상당히 큰 부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말년에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 이 곳에서 순교를 하였다고 한다. 아프리카 선교는 마가로 인하여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마가가 콥틱 교회의 초대 교황이 되었다.
3. 카이로의 무까담 <시몬 동굴 교회>
세번째로 들린 교회는 이집트 기독교인들이 거주하는 카이로 외곽에 세계 최대 규모의 쓰레기 마을에 있는 것이다. 1800만명의 중동과 아프리카의 최대 도시이지만, 위생 서비스가 없는 지역으로 4000t 이상에 쓰레기들이 이 마을에서 분리수거가 되어 지고 종이와 상자들은 끊임없이 쓰레기 압축기에 의해서 처리되는 곳이다. 미로처럼 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보면 온갖 쓰레기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그 마을엔 지밸린(아랍어로 ‘쓰레기’)이라 불리우는 마을 사람들이 60,000명가량 모여 산다. 지밸린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쓰레기들을 재활용하면서 살아왔었다. 콥트 공동체 사람들은 그들은 거의 기업수준으로 그들이 모은 쓰레기를 분리 수거한다. 모두 다른 직업은 없고 쓰레기 분리수거에 전념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만들어주었다.
이 마을의 전통 운송수단은 당나귀 수레이지만 얼마 전부터 도시에서 당나귀 수레의 통행을 금지시키면서 그 자리를 트럭이 대신 메우고 있다고 한다. 카이로의 중산층들이 주로 거주한다는 한 아파트 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쓰레기들을 수거해온다. 시내에 나가서 분리수거를 하면 감옥을 가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밸린들이 처음 카이로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카이로 외곽지역의 가난한 농부들이 카이로의 집주인들과 계약을 맺고 쓰레기 수거 일을 맡아 이주해왔다. 지밸린들이 각 가정에서 받은 수고비는 한 달 3이집트 파운드, 한화 600원 정도라고 한다. 대여한 트럭사용료와 연료비를 감당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또한 트럭을 사용한 사용료를 별도로 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쓰레기 마을의 지밸린 사람들 표정을 유심히 관찰해보았다. 그들은 친절했고, 밝게 웃고 있었다. 분명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정말 행복해서 웃는 것일까? 내가 본 그들의 미소는 거짓 없는 진실한 미소임에 분명했다.
이 마을의 깊숙한 곳에는 바로 유명한 모까담 시몬 동굴 교회가 있다. 그 역사의 기원부터 초대 교회의 능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중동 최대의 교회이다. 동굴 교회의 기도하는 곳 위에는 큰 물병을 짊어진 허름한 옷차림의 성인이 그려져 있다. 동굴 교회의 이곳 저곳에 그려진 이 성인의 이야기는 이슬람의 박해 속에서 콥트 교회가 1300년의 신앙을 지켜올 수 있었던 놀라운 역사를 담고 있다. 큰 물병을 짊어진 허름한 옷차림의 성인, 그가 바로 이 교회의 주인공인 ‘시몬’이다. ‘시몬’은 한 쪽 눈을 보지 못하는 평범한 기독교 성도였다. 그의 직업은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어느 날 구두 수선 차 찾아온 귀부인의 구두를 수선하던 중 여인의 허벅지를 보고 음욕을 품게 되자, 자신의 음란한 마음을 통회하면서 수선 도구인 꼬쟁이로 한 쪽 눈을 찔러서 애꾸눈이 된 사람이었다. 즉, 믿음을 지키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애쓰며 살았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베드로, 요한, 마가 등 위대한 사도들의 이름을 딴 교회는 많지만, 시몬이란 이름을 딴 교회는 별로 없다고 한다.
4. 카이로의 콥트 교황청
또 카이로에는 이집트 기독교인들의 총본산인 교황청이 있는데, 그 안에는 또 다른 ‘성 마가 교회’가 있다. 하지만 이 곳을 찾아올 때, ‘성 마가 교회’보다는 ‘교황청’이라고 하여야 찾을 수가 있었다. 성 마가 교회의 뒤편 지하에는 마가의 무덤이 있다. 마가의 시신을 AD 828년, 이슬람이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베니스사람들이 훔쳐갔다. 이슬람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돼지고기로 그 유해를 덮어 갔다고 한다. 이 마가의 유해를 봉헌한 성당이 바로 이탈리아에 있는 산 마르코 성당이다. 산 마르코에 있던 마가의 유해는 1968년 6월 22일 116대 콥틱교황 키릴로스(Pope Kyrillos VI of Alexandria)의 끈질긴 노력으로 로마교황 바오로6세에 의하여 원위치로 봉환되었다.
<성인 마가의 묘 입구 사진>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브리13:7)문구와 함께 주의사항을 기록해놓고 있다.1월 7일에는 콥틱 크리스마스이다. 이집트의 콥틱 교인들은 예수님이 나신 날을 1월 7일로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콥틱력으로 키오크달의 29일에 해당한다. 전세계적으로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있지만, 이러한 날짜의 차이는 콥틱과 그레고리력과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이슬람이 처음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 무슬림들은 이집트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 행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파티마 왕조는 여러 콥틱, 유대인 관리를 두고 있어서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인들의 축제를 종종 권장하기도 했으며, 사실상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들에게나 무슬림들 모두에 의해 지켜져 왔던 중요한 축제 중의 하나로 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기간동안 교회들을 특별한 양초와 전등으로 장식해오고 있는데, 콥틱인들은 또한 이러한 초나 전등을 그들의 가족, 친척, 이웃에게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선물한다. 이러한 모습은 아기예수가 태어난 날 밤 목수였던 요셉이 마리아를 주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켰던 불을 기념하는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오늘날의 콥틱 크리스마스는 교회의 자정 예배로 이루어진다. 콥틱인들은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자정에 교회에 모이는데 카이로에 있는 성 마가 교회에서는 콥틱교황에 의해 가장 큰 예배가 이루어진다. 콥틱교에는 두 가지 큰 축제가 있는데, 그것은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이다. 그들은 부활절은 가장 큰 축제로, 크리스마스를 그 다음으로 여기고 있다.
콥트 기독교의 축제 전에는 언제나 금식을 한다. 부활절에는 약 55일간 금식을 하고, 크리스마스에는 약40일간 금식을 하는데, 이들의 금식은 무슬림들의 라마단 금식과는 다르다. 콥틱인들은 이 기간 중에는 고기나 계란 우유 버터 등 동물성 식품을 금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하루의 일부를 전혀 음식 없이 지내기도 한다. 콥틱인들은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 금식을 마치고 아이들은 옷과 선물을 받는다. 콥틱인들은 크리스마스에 십자가 무늬를 넣은 비스켓은 만들어 먹는다. 아쉽게도 콥틱 부활절 행사는 4월 말에 있는 관계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여러 어려움과 차별 속에서도 그들의 신앙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들을 기념일 행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성의 구분도 확실했다. 좌측에는 남성, 우측에는 여성으로 좌석이 나누어져 있었다. 타오드로스 교황에 연설문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콥틱교인들의 모습이다.
5. 카이로의 성모 마리아 교회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성모 마리아 교회(Saint Virgin Mary Church)이다. 카이로 나일강 변에 위치한 이 교회에서 이상한 물체에 빛이 발견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보았다. 이 빛이 혼령일수도 있다는 추측과 함께 다양한 구설수가 있었고, 이와 관련된 동영상 자료들을 발견했다. 그 형상에 대한 진실을 밝혀낼 순 없겠지만, 호기심에 성모 마리아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회 정문에는 콥트교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 내부로 들어서니 사람들은 정숙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 교회 답게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며 촛불을 놓고 기도드릴 수 있었다.
교황의 소지품. 복장. 등을 진열해 놓고 있다.
지하의 있는 십자가 문으로 들어가보면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성경공부 방이 있었다. 알고 보니 저녁 예배가 있어서 모였던 것이 아니라, 기쁨(아랍어로 ‘파라하’)의 날이라고 불리는 결혼식이 있는 날이였다. 콥트인들에게는 1~3월까지가 결혼을 가장 많이 하는 기간이라고 한다. 예배는 매일 오전 8시에 시작되지만, 결혼식은 주로 오후 7시에 진행이 된다. 기쁨을 표현하거나 축하할 때 쓰는 표현은 아랍어로 ‘마브룩’이라고 한다. 도대체 몇 커플의 결혼식이 진행되었는지 모르겠다. 한 커플의 결혼식이 진행될 때 바로 뒤에서 또 다른 결혼 행진이 시작되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직접 본건만해도 다섯 커플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글을 마치며>
조사과정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나는 적어도 콥트인들이 이집트 내에서 어떠한 차별과 억압을 받는지 알아보고 싶었고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된 것 같았다. 이집트 콥트인들은 점점 최소한의 보호막조차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나름대로 갖게 되었다.
콥트인들에게는 교회 건설이나 주간지 출간, 콥트 문화나 언어 연구의 자유는 허용되었지만 그래도 수만명의 콥트인들이 이집트 정부의 차별을 피해 미국이나 유럽, 호주로 이민을 떠나고 있다. 특히 <무슬림 형제단> 출신인 무르시 대통령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콥트인들이 다시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집트 내에서 콥트인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 박해가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 콥트인들은 무슬림 아랍인들에 기세에 눌려 불안감과 상실감 속에 살고 있는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콥틱 교회 안에서는 성경공부 열기가 일고 있으며, 콥틱어로 된 주기도문을 외우며 콥트 기독교인임을 더욱 자각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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