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Focus _ 이탈리아. 역사와 문화코드로 읽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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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역사와 문화코드로 읽어내기
김정하(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I. 하나의 알프스, 두 개의 화산 그리고 롬바르디아 평원
이탈리아의 국기에는 세 가지 색이 등장한다. 알프스를 덮은 눈 같은 흰색, 시실리의 에트나(Etna) 화산과 폼페이의 베수비오 화산이 분출하는 용암 같은 붉은 색, 그리고 광활하게 펼쳐진 롬바르디아 평원의 녹색이 그것이다. 롬바르디아의 녹색이 희망을 품어 낸다면, 화산의 용암은 기쁨의 분출을, 유럽의 흰색 지붕 알프스는 반도인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역사에 대한 자문(自問)의 메아리는 반도의 역사인가, 이탈리아인의 역사인가에 모아진다. 장소와 사람에 따라 역사기술의 내용이 달라지며, 그 의미 다르게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문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는 이탈리아의 역사가 발전과 정체 그리고 새로운 삶의 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과거의 진행 속에 머물고 있다는 인식에 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탈리아의 기나긴 여정을 몇 가지의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자. 그리고 지중해의 부드러움을 깊숙하게 끌어안는 이 반도의 시민들을 문화코드의 암호들로 풀어내보자.
I-1. 늑대의 전설
이탈리아의 건국신화에는 늑대가 등장한다. 이탈리아 어디를 가든지 암 늑대가 두 명의 사내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조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로마는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의 신화를 통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하지만 두 형제는 토지분쟁에 휘말리게 되고, 로물루스만이 살아남아 형제의 피로 물든 팔라티나(Palatina) 언덕에 조국 로마를 건설한다.
로마는 그 삶의 시작에 있어서는 라틴인들의 검소함에서 출발하지만 그 끝은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 대륙의 역사로 장식한다. 그래서 오늘날 로마의 역사를 정복의 역사라고 말한다. 혹자는 “정복자 로마가 자신이 정복한 자들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말한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정복한 후에 그리스 문화의 문을 통과한다. 미미한 시작을 위대함으로 마감한 로마는 지중해에 첫 발을 담그던 그 순간에 이미 정복한 그리스에 의해 정복될 운명이었던 셈이다. 이로서 로마는 역사의 흐름이 시간과 공간의 중첩을 통해 프렉탈(Fractal) 구조로 발전한다는 동양적 교훈을 스스로의 운명을 걸고 실천한다.
I-2. 로마보다 더 위대한 도시는 볼 수 없다(Possis nihil Urbe Roma visere maius)
어느 날 교황이 로마를 방문한 한 여행객에게 “로마에 며칠이나 계시는지요?”라고 물었다. 여행객이 3일정도 있을 예정이라고 답하자, 교황은 아리베데르치(Arrivederci), 즉 “우리 다시 만나요”라고 인사를 했다. 또 어느 날 다른 여행객이 같은 질문에 대해 한 달 정도 있을 예정이라고 답하자 이번에는 “(잘 보고)안녕히 가세요”의 ‘차오’(Ciao)라는 표현으로 인사를 했다고 한다.
아리베데르치는 ‘다시 만나요’(See you again)의 의미이다. 3일은 로마를 보았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니 언젠가 다시 로마로 돌아올 사람에게 던진 인사의 표현인 것니다. 반면 한 달은 로마의 깊이를 어느 정도는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니 (가까운 시일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 편히 돌아가라는 의미에서 ‘차오’의 인사말을 한 것이다.
로마는 세계사적으로 적어도 세 가지의 의미를 보유한다. 첫째는 제국의 수도 로마이고, 둘째는 유일신 하나님의 성전 바티칸이 있는 로마이고 그리고 세 번째는 조국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이다. 당신이 본 로마는 어느 로마인가?
서로마 몰락 이전까지 로마는 지중해를 자신의 연못으로 품고 있었다. 또한 로마는, 게르만의 침입으로 공존과 공유를 강요받았을 때에도, 비록 세속의 문의 열쇄는 알프스 이북에 넘겨주지만 신앙의 문의 열쇄는 여전히 보유한다. 이후 피에몬테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이후에는 ‘하나의 반도,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중’을 대변하는 세속국가 이탈리아의 수도로 세례를 받는다.
I-3. 예술의 꽃으로 재생된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13, 14세기부터 15, 16세기경 사이에 전개된 예술운동입니다. 이 기간에 특히 이탈리아인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유일신(Deus)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가르쳤던 중세의 신 중심적인 일방통행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통로로 예술을 선택한다. 그들은 과거 부끄럽고 저속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인간적인 사고의 세속성을 오감(五感)의 예술로 표출한다.
르네상스의 성립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분분하다. 일부는 유럽의 역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던 이탈리아 반도의 주민들이 차선책으로 자기표현의 본능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또 일부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메디치 가문과 같은- 대금융업자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예술에 투자한 결과이며 이를 통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토스카나 공국과 같은 지역 국가의 초기 권력형태가 등장하였다고 주장한다. 자본이 예술을 만나 권력을 창출한 이탈리아의 고유한 방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성을 조금만 더 보태어 말한다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지성의 세속화를 대변하는 대학의 등장(볼로냐 대학, 1088), 동서 문명이 활발하게 교차하던 지중해에서 다양한 시간대의 여러 문화와 문명들이 빚어낸 문화유산의 등장, 신대륙의 존재 확인, 잉여농산물에 의한 상업혁명의 현상 등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I-4. 통일 속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의 남북문제
영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듀건은 이탈리아의 통일을 미완의 역사로 규정한다. 그의 주장은 ‘하나의 영토, 하나의 민중’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마의 몰락(기원후 476)부터 이탈리아의 통일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이탈리아 중북부의 자치주의 성향과 남부의 전제주의적인 외세의 통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탈리아의 완전한 통일을 저해하는 위의 두 요인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축제를 비롯한 지적행사의 대부분은 중세에 기원하는 만큼, 그 전통과 역량은 각 자치도시의 삶의 색채를 매우 화려하게 유지시킨다.
반면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는 협력과 분업의 체계가 상당부분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다. 정치에서 지방분권의 전통과 습관은 대립을 조장하며 그 틈새를 노리는 정치기술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아울러 당색과 당파에 따른 잦은 정권교체로 인해 조석지변의 국가정책에도 원인을 제공한다. 경제에서는 북부의 공업중심적인 경제모델과 남부의 농업중심적인 경제구조가 전혀 유기적인 공존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든다.
II. 천천히 서둘러라(페스티나 렌테 Festina lente)
우리의 기억에는 아직도 ‘Slow city’, ‘Slow food’의 의미들이 생생하다. 어휘적으로는 느리게 작동하는 도시에서 느리게 먹은 삶을 살자는 뜻으로 의역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으로는 겉으로는 느리지만 결코 느리지 않으며, 시간적으로 천천히 먹지만 게으르기 보다는 자연과 소통하는 인간성과 식(食)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자는 의미를 내포한다. Festina lente.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으로 초대 황제에 등극한 옥타비아누스는 전환점의 로마를 새롭게 건설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원칙으로 “천천히 서둘러라”를 주창한다.
느리지만 결코 느리지 않을 것이라는 현대적인 삶의 철학은, 천천히 하지만 철저하게 한다는 황제의 믿음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풍자하는 표현들 중에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나라”라는 말이 있다. 언 듯 들으면 국가의 불행을 자초하는 한심한 국민들의 생각 같다. 하지만 이 역시 반전의 차원에서 “당연히 되는 일을 안 되게 할 수 있으면서도 안 되는 일을 되게 할 수도 있는 나라”로 해석될 수 있다.
II-1. 캄파닐리즘(Campanilism)
캄파닐리즘은 중세 이탈리아 자치도시들의 주민들이 도심에 위치한 높은 첨탑의 종소리가 도달하는 지역들에서 함께 공유하던 공동의 의식과 행동성향, 즉 애향심의 상징이다. 로마제국의 붕괴로 공권력이 사라진 현실에서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만의 공인된 질서를 차선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다.
캄파닐리즘은 한편에서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고향에 대한 애착심으로 상속되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일을 하더라도 쉬는 날에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공유하며 찬찬한 산책을 즐긴다. 그리고 어머니가 준비해준 음식을 가지고 다시 일자리로 돌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캄파닐리즘은 모성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가톨릭권의 생활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비록 사회의 외피는 특히 남부에서 가부장제로 치장된 듯이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성 중심의 가정, 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보여준다.
중세적 기원에 있어 이탈리아의 캄파닐리즘은, 이슬람의 l'ʿaṣabiyya(ﻋﺼﺒﻴـة)와 마찬가지로, 결코 고향에 대한 귀소본능, 전통과 관습에 대한 긍지를 자기우월적인 심정으로 과도하게 표출하지 않았다. 13-15세기 이탈리아중북부의 자치도시들은 서로의 축제와 공적인 행사를 통해 내부적인 결속을 기대하며 자긍심을 공유하는 평화의 캄파닐리즘을 형성했다. 때로는, 피렌체의 경우 친황제파와 친교황파의 대립으로 연출되어, 백색 친교황파의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가 유배를 가기도 하였지만 이는 도시의 패권을 향한 권력집단들의 작은 몸부림이었다.
반면 오늘날에는 도시들 간의 경쟁, 때로는 스포츠에서의 승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derby) 그리고 국가 간 과장된 민족주의로 인해 변질된 모습으로 연출된다.
II-2. 화려함과 우화함
미국의 이문화관리(Intercultural management) 전문가인 마틴 개논(Martin Gannon)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문화코드로 오페라(Opera)를 지적한다. 오페라는 노래와 가사 그리고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 관객들에게 화려한 연기와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반면 심포니는 독일의 대표적인 문화코드로서, 어느 정도의 개인기와 창조적 제스처를 허용하는 오페라와는 달리 수많은 악기들 간의 유기적이고 치밀한 협력을 요구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상호간 관계, 예를 들어 모든 가족이 함께하는 일요일 점심 만찬은 마치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것과 같다. 나름의 우화한 자기 연출, 자기를 주장하고 표현하려는 화려한 외적 표현의 제스처들, 집단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오페라의- 솔로(Solist)의 모습들이 교차한다. 이러한 성향은 겸손과 양보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와는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단에서 성공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주변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추천하고 좋게 평가해 주는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스스로의 장점을 자신이 드러내지 않으면 주변의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또한 당사자가 거절의 겸손(?)을 보이는 경우 -겸손의 행위로 간주하는 우리와는 달리- 이를 진정한 의사표현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이탈리아의 문화코드인 오페라에는 이탈리아인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전제된다. 화려함은 허영이 아니며 자신을 설계하는 효과적인 무기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의 화려함은 우화함으로 연결될 뿐 결코 사치의 의미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이탈리아는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이들에 대한 소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곱씹어 볼 대목이다.
II-3. 광장문화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광장을 제 2의 집으로 간주한다. 이탈리아인들의 화려하고 풍부한 제스처는 집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광장에서 잘 드러난다. 광장은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에 그리고 퇴근하거나 상점들이 문을 닫는 오후 5시를 전후한 시간에 가장 분빈다. 그렇다고 모두가 인위적으로 합의한 시간대는 아니다. 오히려 Slow city의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동의 생활습관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공적인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만남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도마니(a domani)’, 즉 ‘내일 봐’라고 말한다. 광장 산책의 흐름을 타면 자연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3, 4일 동안 보이지 않으면 그 때 연락을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신상에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