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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2,366 조회 날짜 24-07-0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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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낭만과 서구 근대의학



배민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인문한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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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있는 한 장의 낭만적인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사진을 소개해 본다. 예술 사진은 아니고 인터넷 뉴스 기사에 삽입된 한 장의 사진이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수영을 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고 있다. 이 사진은 사실 작년 남유럽의 불볕 더위가 이어지던 가운데 프랑스 남부의 니스에서 한 남자가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작년 남유럽은 이례적인 폭염을 겪은 바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작년 수도 로마의 최고 기온이 41.8도로 관측되기도 했다. 이는 그동안 로마에서 관측된 기온 가운데 가장 높은 기록이기도 했다. 이전 로마 최고 기온은 40.7도였다. 로마의 보건 전문가들은 폭염이 취약 계층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였고, 로마 중심가에선 자원봉사자들이 콜로세움처럼 사람들이 붐비는 관광 명소에서 물병을 나눠주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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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중해는 온화한 기후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따뜻한 겨울로 유명하다. 남유럽은 바로 이러한 기후적 특성으로 인해 서양 근대 유럽사에서 여행의 역사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위 사진에서 보이는 것같은 고급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유럽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그 이전에는 매우 부유한 귀족들이 하던 여행을 19세기에 철도가 깔리면서 보다 많은 중산층이 즐기게 된 것이다. 유럽인들은 철도 덕분에 온천 도시와 해변 도시를 보다 손쉽게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따뜻한 남쪽, 남유럽으로의 여행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남유럽 여행의 기원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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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세기에 많은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에는 남유럽이 배경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위 그림은 화가 티슈바인의 ‘캄파니아의 괴테’라는 아주 유명한 그림인데, 18세기 후반 이탈리아 여행 중 로마를 바라보는 괴테를 그렸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서양화의 중심이 프랑스로 옮겨가는 19세기 말 이전까지 유럽의 풍경화의 단골 배경이었다. 아래 그림은  17세기 그림 중에서 클로드 로랭의 ‘이집트로 도피 중 휴식을 취하는 예수 일가가 있는 풍경’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녹음이 우거진 자연과 더불어 폐허가 된 전원 풍경을 고대 문명을 동경하듯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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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안식처를 찾으려는 욕망이 빚어낸 이러한 이탈리아 풍경화에 대한 애정은 근대로 오면서 보다 현실의 관광산업과 맞물리게 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대한 문화적 동경이 한몫하기도 하였다. 특히 18세기에 계몽사상의 보급과 함께 종교적 갈등이 사라지자 귀족과 상인들 사이에 유행병처럼 외국 여행 붐이 일어났다. 

지중해 여행이 절정에 달하는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는데, 철도의 개통 (1840년대) 때문이었다. 영국에 이어 프랑스와 독일 등 중산층의 급증으로 인해 철도를 통한 그랑투어 참가자는 전 유럽에서 급증하였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지중해가 가장 낭만적이었던 것은 철도여행으로 지중해 관광이 대중화되기 이전 괴테와 바이런, 스탕달 등이 이탈리아 여행에 관련한 글을 썼던 낭만주의 시대였다. “이탈리아 여행기”를 남겼던 괴테를 비롯해, 바이런은 그의 짧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지중해 지역에서 보냈다. 19세기 영국 여행객들은 바이런의 작품을 지중해 여행의 안내서로 삼기도 했다.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은 19세기초 이탈리아에 그랑 투어를 했던 자신의 경험을 흥미 진진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 속에 녹여내었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이전의 귀족들이 교양을 위해 가던 여행이 낭만으로서의 여행으로 변화되어 나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중해의 이미지는 낭만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이러한 낭만주의는 과학과 의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의학에서의 낭만주의는 특히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18세기 후반 의사였던 존 헌터(John Hunter) 와 존 브라운(John Brown)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낭만주의의학(Romantic medicine)의 절정은 독일에서였다. 그 뿌리는 독일 관념론이었는데, 이는 생명의 원리(life principle)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하여, 인간과 자연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특히 칸트의 인식론적 철학의 연장선에서 독일관념론, 혹은 독일 이상주의철학(German Idealism)이 그 낭만주의 의학의 직접적인 토양이 되었다. 

독일 관념론자 중 독일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의 바탕을 제공한 철학자가 셸링과 피히테였는데, 조금 복잡하게 들리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독일 관념론에서 자연에 대한 부분이 독일 자연철학, 보다 정확히는 낭만주의 자연철학(Romantische Naturphilosophie)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낭만주의 철학이기도 했다. 즉 낭만주의 철학 자체가 독일 관념론의 한 부분이었다. 

특히 슈레겔 (사진)은 가장 대표적인 로맨틱 철학가로서 많은 이에게 -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등 – 영향을 주었다. 로맨틱 철학의 주된 대상은 자연과 역사였고, 이는 계몽주의의 합리론적 흐름 속에서 자연과학이 인문학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향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즉 인문학은 자연과 역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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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낭만주의 자연철학은 자연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이론적 구조를 자연과학의 기반으로서 제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생기론 등의 이론이 실험과학의 발달 속에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이후 독일자연철학은 과학의 역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리히비그 같은 생리학자는 독일 자연철학을 흑사병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낭만주의 자연철학의 한 흐름으로서, 하지만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한 영역이기도 했던, 로맨틱 의학은 18세기 후반 서양 의학의 위기 속에서 생명에 대한 과학화를 추구했던 시도였다. 즉, 물리학이나 화학 처럼 수학에 기반한 물질 과학을 넘어선, 역사에 기반한 병리학과 생리학을 중심으로 하여 생명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는 개인 치료자의 술식에 의존하는 주관적 기술을 초월하는 과학적 이론화를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이기도 하였다. 

결국 시간이 가면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뿌리를 둔 프랑스의 분석적 접근 방식이 과학의 주류가 되면서 로맨틱 의학은 의학의 영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로맨틱 의학의 의학사적 의미는 기계론적이고 화학적인 원리를 넘어선 생명의 작동 원리를 진정한 생리학을 통해 정립하고자 하였던 데에 있었다.  

실제로 낭만주의 의학은 생리학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는 현대의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사가 바라보는 인간의 몸과 일반인이 바라보는 인간의 몸의 가장 큰 인식론적 차이는 아마도 생리학에 있을 것이다. 의과대학의 기초의학 과목 중 가장 중요한 과목인 생리학은 실제로 서양 근대의학의 핵심이었다. 낭만주의 의학이 의학사에 기여한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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