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Focus _ 파티마조의 북아프리카와 시실리아 종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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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조의 북아프리카와 시실리아 종교정책
황병하(조선대학교 명예교수)
1. 파티마조의 등장과 북아프리카의 정치·종교 현황
파티마조는 시아 이스마일파의 종교적 이념을 토대로 등장했다. 우마이야조 초기 순니파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했던 시아파에 대한 동정심이 이슬람 세계로 확산되면서 북아프리카에서도 시아파 정치집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모로코의 이드리스조(Idris: 788~974)와 튀니지의 아글랍조(Aghlab: 800~909)에서 시아파 종교집단의 활동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지역에는 시아 이스마일파보다 먼저 순니파 말리키(Maliki) 법학파와 카리지파(Kharijiyya)가 베르베르족을 중심으로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이후 시아파의 영향력은 모로코와 튀니지와 시실리아를 거쳐 순니파를 따랐던 이집트로 확대되었다.
이슬람 세계 중심부인 바그다드 압바스조의 이집트 통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압바스조 칼리파는 투르크 출신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Muhammad Ibn Tughz: 935~946)를 이집트의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의 능력을 신뢰한 압바스조 칼리파 알 라디(al-Radi: 934~940)는 그에게 옛 이란 지방 영주가 사용했던 이크쉬드(Ikhshid)라는 국호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집트 카이로의 사원과 병원 등 건축에서 이집트의 발전에 기여했던 툴룬조와는 달리 이크쉬드조(935~966)는 이집트의 문학과 예술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지 못한 채 튀니지에서 쳐들어온 파티마조(Fatimid)에게 멸망하였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우마이야조를 멸망시키고 압바스조를 창건하는데 기여했던 시아파의 영향력이 이슬람 세계 중심부에서 점차 확대되면서 이스마일파의 활동 범위도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스마일파의 실질적 창시자인 압둘라 이븐 마이문(Abdullah Ibn Maymun)의 후계자인 사이드 이븐 후사인(Said Ibn Husayn)은 9세기 말경 종교선교사 다이(da'i)인 압둘라 알 후사인 알 쉬이(Abdullah al-Husayn al-Shi'i)를 북아프리카로 파견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순니파를 믿고 있었던 베르베르족을 대상으로 자신을 시아 이맘 알 마흐디(al-Mahdi: 구세주)의 대리인이라 주장하면서 시아 이스마일파 교리를 전파하였다. 당시 베르베르족은 아글랍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주로 사막과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정착과 발전에 치중했던 아글랍조에 경제적·정치적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압둘라가 베르베르족을 대상으로 이스마일파 교리전파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자 사이드는 시리아에서 북아프리카로 이동하였다. 909년 사이드는 베르베르족의 도움을 받아 아글랍조의 수도인 라까다(Raqada)를 점령하고 이스마일파 교리의 파티마조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파티마조를 세우면서 그는 자신을 이맘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Ubayd Allah al-Mahdi: 873∼934)라 칭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6대 이맘의 아들인 7대 이맘 이스마일의 후손임을 선언하였다.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는 873년경 시리아 홈스의 살라미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을 시아 7대 이맘 이스마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4대 칼리파 알리와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혈통을 내세웠다. 하지만 순니파는 이런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집트 파티마조를 탄생시킨 시아 이스마일파는 원래 암살과 반란을 모색하며 이집트에서 인도의 신드까지 세력을 장악하였다. 시아파는 이맘 직의 계승 문제로 자이드파, 이스마일파, 그리고 열두 이맘파로 갈라졌다. 자이드파는 5대 이맘 자이드 이븐 알리를 이맘으로 주장했으며, 7대 이맘파는 이스마일을 이맘으로 주장했고, 열두 이맘파는 알 마흐디를 이맘으로 간주하였다.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의 행적에 관한 첫 기록은 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그는 아내와 아들 알 카심과 함께 살라미야를 출발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거쳐 마그립으로 갔다. 그가 마그립으로 이동한 이유는 이스마일파의 다이였던 아부 압드 알라 알 쉬이로부터 서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알 쉬이는 파티마조의 탄생에 기여한 인물로서 이스마일파 국가 수립을 염원하였으며, 알 마흐디의 혈통과 정치적 정통성을 국가 수립에 활용하였다)
파티마 칼리파조는 909년 튀니지에서 등장하였으며, 이후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순니파 바그다드 압바스조와 북아프리카에 대한 세력권 쟁탈전을 벌였다. 파티마조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계에는 3명의 칼리파가 등장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시아 이스마일파였던 파티마조는 압바스조의 순니파 칼리파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만이 이슬람공동체의 합법적 통치자임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이슬람 세계에는 바그다드의 칼리파, 스페인의 칼리파, 파티마조의 칼리파 3명이 통치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2. 파티마조와 시아 이스마일파의 관련성
파티마조는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잘 정리된 문서와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 중 하나였다. 중세 이슬람 역사의 많은 역사가와 연대기 학자들은 파티마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으며, 다양한 비문학적 정보들도 제공하였다. 하지만 시아 이스마일파 파티마조가 1171년 붕괴하고, 이집트의 통치 권력이 순니파 아윱조와 맘룩조로 넘어가자, 파티마조의 도서관들은 파괴되었으며, 시아 이스마일파 관련 작품과 기록들은 상당 부분 폐기되었다. 이런 이유로 현존하는 파티마조 시아 이스마일파에 관한 다양한 작품과 기록들은 비밀스럽게 보존되었거나 개인적으로 소장된 것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역사와 교리는 파티마조 및 시아파 사상에 적대적이었던 순니파 역사학자들에 의해 배타적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파티마조의 시기는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는 북아프리카 시기였으며, 909년 이프리끼야(Ifriqiyya)에 파티마 정권을 수립한 시기로부터 969년 이집트 정복과 973년 파티마조의 근거지를 이집트로 완전히 옮긴 시기까지의 64년을 의미한다. 이 기간 동안 파티마조는 주로 칼리파 제국의 기초를 다지고 존재감을 확립하는데 몰두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973년부터 1094년 알 만수르(al-Mansur)가 사망할 때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파티마 칼리파 제국은 이집트에 완전히 정착하였으며, 정치적 안정화를 이룩하였고, 문화적 발전과 영토 확장의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이후 파티마조는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종교선교사(다이)로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던 압둘라 알 후사인 알 쉬이는 예멘의 사나아 출신이었다. 그는 895년부터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의 키타마(Kitama) 부족을 대상으로 이스마일파의 첫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키타마 부족은 대부분 시아파였고 강한 영지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 부족과 함께 메카로 순례를 갔다 온 후부터 이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알 쉬이가 키타마 부족을 대상으로 이스마일파 선교에 성공하자, 우바이드 알라는 살라미야(Salamiyya)에 있는 이스마일파 본부를 떠나 상인으로 변장한 채 아글랍조가 통치하고 있었던 북서 아프리카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순니파 압바스조의 감시를 피해 이집트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던 우바이드 알라는 시질마사(Sijilmasa)에서 아글랍조의 지야다트 알라(Ziyadat Allah)에 의해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우바이드 알라의 투옥 소식을 들은 알 쉬이는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까이라완을 공략하여 시질마사 감옥에서 우바이드 알라와 그의 아들을 구출하였다. 이후 우바이드 알라와 알 쉬이는 약 40일간 시질마사에 머물면서 시아 이스마일파를 전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이드(우바이드 알라, 909〜934)와 알 쉬이는 909년 아글랍조를 멸망시키고 까이라완의 통치자 지야다트 알라를 국외로 추방하였다. 사실 아글랍조는 이프리끼야에서 순니파 이슬람을 지켰던 최후의 보루였다. 정권을 장악한 사이드는 자신을 이맘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라 칭하고, 파티마와 후사인과 이스마일의 자손임을 선언하였으며, 시아 이스마일파 교리를 본격적으로 전파하였다. 사이드가 건설한 파티마조는 사이드의 족보를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우바이디야조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맘 우바이드 알라는 통치 기간 동안 영토 확장 정책과 종교 화합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까이라완 외곽 라까다에 파티마조의 수도를 정하고, 시아 이스마일파 교리를 기본으로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였다. 우바이드 알라의 영토 확장 정책을 계승한 사람은 2대 칼리파 아부 알 까심 무함마드 알 까임(al-Qa'im: 934~946)이었다. 그는 934년과 935년 프랑스 남부 해안으로 함대를 파견하여 제노아와 카라브리아를 점령하고 노예와 전리품을 확보하였다. 파티마조 팽창정책의 핵심은 969년 이집트 정복이었으며, 이 정복에는 다문화정책과 종교 화합 정책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파티마조의 이집트 공격을 성공으로 이끈 영웅은 자우하르 알 시낄리(Jawhar al-Siqilli: 시실리아 사람 자우하르)였다. 그는 비잔틴의 영토였던 시실리 출신 기독교인으로서 루미(rumi: 그리스인)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전쟁 포로로 잡혀 까이라완에서 노예로 살다가 무슬림으로 개종한 후 자유인이 되었다. 자우하르는 969년 이집트의 수도 푸스타트로 입성하자마자 오늘날의 카이로인 알 까히라(al-Qahira: 승리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까히라는 973년에 이집트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후 아프리카의 도시들 중 가장 분주한 학문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자우하르는 972년 알 아즈하르(al-Azhar) 모스크를 건설하였으며, 이 모스크는 칼리파 알 아지즈(al-Aziz)에 의해 고등교육 시설인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자우하르의 이집트 정복은 파티마조의 제2의 창건이었다. 이로써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는 스페인을 제외한 동부의 순니파 압바스조와 서부의 시아파 파티마조로 양분되었다.
5대 칼리파 아부 만수르 니자르 알 아지즈(975~96) 시기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평화의 시기였다. 6대 칼리파 아부 알리 만수르 알 하킴(al-Hakim: 996~1021)의 시기는 종교적 탄압과 정치적 비극으로 점철된 시기였으며, 파티마조의 몰락을 자초한 시기였다. 파티마조가 알 하킴 시기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 이유는 종교정책의 급격한 변화와 통치력의 상실 때문이었다. 그는 부친의 종교적 인내와 관용정책과는 반대로 기독교 재상들을 처형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묘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 교회들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을 무슬림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들에게 검정색 옷을 입을 것과 당나귀만을 타고 다닐 것을 강요하였으며, 목욕탕에서는 기독교인인 경우 십자가를 목에 걸고 유대교인인 경우 벨이 달린 요크(천)를 목에 걸도록 명령하였다. 이슬람 역사에서 딤미(dhimmi) 등 비 무슬림들을 가장 혹독하게 탄압한 칼리파는 압바스조의 알 무타와킬과 오마르 2세 그리고 파티마조의 알 하킴이었다. 그의 기이한 정치적·종교적 행동들은 배타적 종교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자신에 대한 신격화로 이어졌다. 이렇게 등장한 시아파 집단이 바로 드루즈파(Druze)였다. 알 하킴이 사망한 후 파티마조는 급격히 붕괴되었다. 파티마조의 위상이 약화되자 내부에서는 터키 출신, 베르베르 출신 그리고 수단 출신 용병들 간에 끊임없는 갈등이 증폭되었으며, 국가 권력은 거의 마비되었다. 더욱이 7년 간 지속된 기근으로 파티마조의 경제 상황은 절대적인 위기를 맞이하였다. 파티마조의 후반부는 군부 내 분파들의 지원을 받았던 재상들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집트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1167년에 카이로의 문턱까지 치고 들어왔던 예루살렘의 왕 아말릭의 집요한 공격은 파티마조의 운명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결국 파티마조는 1171년 살라흐 알 딘(Salah al-Din)에게 멸망하였다.
3. 파티마조의 북아프리카와 시실리아 종교정책
종교적으로 파티마조는 북아프리카의 강력한 두 순니파 세력과 패권다툼을 벌였다. 그 하나는 말리키 법학파를 추종하는 순니파 세력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베르베르족의 대부분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카리지파 순니파 세력이었다. 두 세력 중 카리지파 순니파 세력은 파티마조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최대의 난적이었다. 베르베르족은 주로 마그립(Maghrib) 지역에 퍼져 있었으며, 주로 자나타(Zanata)와 산하자(Sanhaja)에 거주하고 있었다. 마그립 지역은 스페인 우마이야조의 영향력 하에 있었는데, 초기 파티마조는 정치력을 확대하고 안정화를 이룩하기 위해 반드시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야만 했다.
자나타 지역의 베르베르족은 카리지파의 이바디(Ibadi) 사상을 추종하고 있었으며, 파티마조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우마이야조의 후원과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주로 마그립의 서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산하자(또는 Sinhaja) 지역의 베르베르족은 쿠타마(Kutama)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주로 마그립의 중앙부와 동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 쿠타마 베르베르족은 시아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였으며, 파티마조 군대 조직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칼리파 알 마흐디가 등극한 후 그와 선교사(da’i) 아부 압둘라 알 쉬이 사이에 심각한 견해 차이가 발생하였다. 쟁점은 세금 제도 확대와 칼리파 권력의 제한에 관한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쿠타마 베르베르족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아부 압둘라가 칼리파에게 대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알 마흐디는 아부 압둘라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쉽게 움직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를 강경 조치로 다루지 않고 온건 화해 정책으로 포용하였다. 이후 911년 칼리파 알 마흐디는 아부 압둘라와 그의 동생 아부 알 압바스를 비밀스럽게 처형하였다. 아부 압둘라의 사망 소식은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흥분시켰으며, 이들 중 일부는 공개적인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알 마흐디는 베르베르족의 저항이 확산되기 전 이 반발을 재빨리 제압하는 조치를 취했다. 쿠타마 지역의 베르베르족 반란을 진압한 알 마흐디는 789년 마그립 서부 지역에 처음으로 시아파 국가를 수립한 이드리스조와 대결을 벌였으며, 자나타 베르베르족도 모두 복속시켰다.
자나타 베르베르족의 도움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타하르트(Tahart)의 카리지파 루스탐조(Rustamid)는 선교사 아부 압둘라의 쿠타마 부족 전사들에 의해 909년 붕괴되었다. 하지만 타하르트는 여전히 이바디 카리지파 베르베르족의 중심지였으며, 마그립 서부 지역의 자나타 베르베르족은 파티마조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모로코의 이드리스조에 복종했던 마살라 븐 하부스(Masala b. Habus)에 의해 911년 진압되었으며, 타하르트도 재함락되었다. 파티마조는 921년 시질마사를 정복하였다. 924년 마살라가 사망하자, 부관 이븐 아비 알 아피야는 마그립의 서부 지역에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사브타(Sabta, 또는 Ceuta)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그는 932년 반 파티마조 운동을 벌이며 파티마조로부터 이탈하였으며, 스페인 우마이야조 압드 알 라흐만 3세(912-961)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였다. 파티마조는 2대 칼리파 무함마드 알 까임 비 아므릴라(Muhammad al-Qa’im bi-Amr Allah) 시기에 마그립 서부의 이븐 아비 알 아피야를 패퇴시키고 파티마조의 권력을 다시 회복하였다. 이로 인해 코르도바의 우마이야조는 더 이상 북아프리카에 대한 팽창정책을 추진하지 않았으며, 자나타 베르베르족과 코로도바의 우마이야조 사이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파티마조는 처음부터 이슬람 세계 전체에 대한 통치 권력을 꿈꾸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정적인 압바스조를 먼저 정복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이들은 압바스조 칼리파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이집트 정복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파티마조는 알 마흐디 시기에 두 차례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칼리파 알 마흐디는 북아프리카 동부 지역과 지중해 지역으로 좀 더 수월하게 접근하기 위해 921년 이프리끼야의 동부 해안에 마흐디야(Mahdiyya)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수도를 까이라완에서 이 도시로 이전하였다. 이후 파티마조는 수도를 무함마디야와 만수리야로 이전하였다. 마흐디야에는 조선소가 건설되었으며, 여기에서 생산된 선박들을 바탕으로 파티마조는 강력한 해군 함대를 구축하였다. 파티마조의 함대는 2차 이집트 공격 당시 처참하게 패배하였는데, 이유는 선장의 경험 부족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티마조 해군이 경험과 실력을 축적하면서, 이들은 곧 지중해 전역에서 다양한 전투와 공격을 감행하였다. 2대 칼리파 알 까임 시기인 935년에 파티마조는 세 번째로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도 패배하였다. 이후 파티마조는 30년 동안 이집트를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파티마조의 이집트에 대한 군사 공격은 시아 이스마일파 선교사들의 이집트 유입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전쟁 기간 동안 비밀스럽게 이집트로 침투하였으며, 군인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고, 여기에는 비무슬림(딤미)도 포함되었다. 이집트 이크쉬드조는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이들과 이집트 내 협력자들의 상당수를 체포하고 처벌하는데 성공하였으나, 파티마조는 선교사들의 이집트에 대한 종교적 공략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튀니지 아글랍조의 계승자로서 파티마조는 메시나(Messina) 해협으로 이탈리아와 분리되어있는 시실리아(Sicily, 아랍어 Siqilliyya) 섬을 인계받았다. 아글랍조는 비잔틴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실리아에 대한 점진적 정복 활동을 통해 878년에 정복하였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 남부의 칼라브리아(Calabria) 섬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시실리아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수 차례의 공격과 정복을 당했으며, 이주를 통해 다양한 종교를 가진 인종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롬바르드(Lombard)인, 그리스인, 기독교인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무슬림, 그리고 유대인 등이 포함되었다. 종교적·인종적 이질성은 시실리아에서 발생한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었다. 아글랍조의 통치하에서 시실리아는 팔레르모(Palermo)에 거주했던 아미르(amir)에 의해 통치되었다. 아글랍조에서 파티마조로 통치 권력이 이양된 이후에도 시실리아의 통치 방식과 전통은 지속되었다. 파티마조에서 시실리아 통치자로 처음 파견한 인물은 이븐 아비 알 파와리스(Ibn Abi al-Fawaris)였다. 그는 아글랍조에서 시실리아의 아미르였으며, 파티마조의 대의명분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파티마조에서도 아미르로 임명되었다. 그의 후임자는 910년에 임명된 알 하산 븐 아흐마드(al-Hasan b. Ahmad)였으며, 이븐 아비 킨지르(Ibn Abi Khinzir)로 더 알려져 있었다. 그는 파티마조로부터 더 많은 신임을 얻었으며, 이전에 까이라완의 경찰 수장이었다. 912년 시실리아 팔레르모와 기르겐티(Girgenti)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은 이븐 아비 킨지르의 부임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알 마흐디가 파견한 그의 후임 알리 븐 우마르 알 발라위(Ali b. Umar al-Balawi)도 거부하였다. 파티마조와 시실리아 사이의 정치적 상황이 어렵게 전개되자, 시실리아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인 이븐 꾸르훕(Ibn Qurhub)을 선출하였다. 그는 아글랍 가문과 연계되어 있었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압바스조 칼리파 알 무끄타디르(al-Muqtadir, 908-932)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파티마조의 통제를 받지 않은 시실리아의 실질적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이프리끼야의 새로운 시아파 통치자들로부터 억압과 탄압을 받았던 말리키 법학파 무슬림과 피난민들이 시실리아로 유입되었다. 하지만 이후 시실리아 기르겐티의 베르베르인들은 통치자 이븐 꾸르훕에 대항한 봉기를 일으켰으며, 916년에 그를 체포하여 파티마조 알 마흐디에게 인계하였고, 나중에 그는 알 마흐디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후 시실리아는 다시 파티마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시실리아 내 간헐적 소요 사태는 계속 발생하였다.
948년 파티마조 칼리파 알 만수르는 시실리아에서 재발하고 있는 반 파티마조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알 하산 븐 알리 알 칼비(al-Hasan b. Ali al-Kalbi)를 시실리아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마그립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바누 아비 알 후사인(Banu Abi al-Husayn)의 칼비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임명은 파티마조를 대신해 시실리아를 거의 백 년 동안 통치한 준 독립국가 칼비조(Kalbid)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1세기 중엽 경 시실리아에서는 내전과 비잔틴 제국의 침공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칼비조의 몰락과 이탈리아 노르만족의 점진적 영토 잠식으로 이어졌다. 칼비조의 시실리아는 시실리아 이슬람의 전성기였으며, 가장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시실리아는 이슬람을 바탕으로 이프리끼야와 가장 활발한 무역 거래를 하였으며, 팔레르모는 전통적인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고, 여기에는 많은 이슬람 모스크들이 건축되었다. 파티마조의 시실리아는 유럽으로 이슬람 문화를 전달하는 중요한 중간지 역할도 담당하였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파티마조의 시아 이스마일파 선교사들은 시실리아 섬으로 거의 침투하거나 방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파티마조의 속국으로서 파티마조의 통치 영향력 하에 놓여있었던 칼비조의 아미르들과 통치집단들은 외향적으로만 파티마조 이스마일 사상에 동조하고 있었다. 파티마조의 시아 이스마일파 선교사들이 시실리아에서 적극적으로 종교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없었으며, 시실리아 칼비조 무슬림들은 여전히 말리키 법학파 순니파 사상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실리아에도 시아 이스마일파 사상을 믿고 있는 신자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파티마조가 이집트로 본거지를 옮긴 이후 순니파의 억압을 피해 이프리끼야에서 시실리아로 피난온 무슬림들이었다.
파티마조 초기 칼리파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지중해 서부 도서들의 해안 도시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시실리아를 활용하였다. 이들은 한편으로 전쟁을 벌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시실리아 동부 지역과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던 비잔틴 제국과 외교적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해야만 했다. 문제는 비잔틴 제국이 때때로 스페인 우마이야조와 동맹관계를 맺으며 파티마조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알 마흐디 시기에 파티마조 군대는 비잔틴 제국에게 연례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하기 위해 롬바르드와 칼라브리아 해안을 공격하였다. 또한 이들은 살레르노(Salerno)와 나플레스(Naples) 지역에 대한 해상 공격을 감행하였다. 934년 칼리파 알 까임은 마흐디야로부터 이탈리아로 20척의 함선을 파견하였으며, 935년에는 제노아를 침공하여 약탈하였고, 상당한 전리품을 확보한 후 이프리끼야로 귀환하였다. 파티마조 함대는 프랑스 남부 해안 지역도 공격하였으며, 일시적으로 사르디니아(Sardinia) 섬과 코르시카(Corsica) 섬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파티마조는 수 차례의 해상 전투를 치르며 956〜957년 이탈리아의 비잔틴 세력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겼으며, 이로 인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는 칼리파 알 무잇즈(957〜958) 시기에 조공을 바쳤고 평화협정 체결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962년 시실리아의 칼비조 두 번째 통치자 아흐마드 븐 알 하산(Ahmad b. al-Hasan)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시실리아 섬의 동부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지역에는 비잔틴 제국의 보호하에서 준독립 상태의 기독교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동년에 칼비조는 시실리아 무슬림 정권의 통치에 저항했던 타오르미나(Taormina)를 점령하였으며, 도시 이름을 파티마조 칼리파 알 무잇즈의 이름을 따 무잇지야(Mu’izziya)로 바꿔버렸다. 초기 칼비조 통치자들은 비잔틴 제국과 지속적으로 간헐적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이탈리아 남부 지역의 다양한 소규모 국가들간 다툼에 대한 중재 역할도 요청받았다. 964년 황제 니세포루스 Ⅱ 포카스(Nicephorus Ⅱ Phocas)가 등극하였으며, 그는 파티마조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고 시실리아 칼비조와의 적대관계를 다시 조장하였다. 하지만 시실리아의 비잔틴 세력은 파티마조와 칼비조 연합군에 육지와 해상에서 처참히 패배하였다. 시실리아 섬에 있던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보루 라메타(Rametta)는 이슬람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파티마조와 비잔틴 제국 사이에 체결된 967년 평화협정에 따르면, 이슬람 정권은 시실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지즈야(jizya, 인두세)를 거둘 권리를 확보하였다. 이슬람 세계 동부 지역의 무슬림들을 지속적으로 위협했던 비잔틴 제국이 시실리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이슬람 세계 전체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파티마조는 비잔틴 제국이 공공의 적인 독일 황제 오토 1세(Otto Ⅰ)와 협력관계를 체결하자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오토 1세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10여 년이 지난 후 파티마조와 비잔틴 제국 사이의 관계는 다시 한 번 대결 구도로 변화되었다. 칼비조는 비잔틴 제국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Apulia)를 자주 공격하였으며, 이런 상황은 시실리아 칼비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이집트까지 강력한 통치 기반을 구축했던 파티마조 초대 칼리파 우바이둘라 알 마흐디는 25년의 칼리파 통치와 약 35년의 이맘 직위 수행을 마치고 934년 3월 사망하였다. 2대 칼리파는 살라미야로부터 마그립까지 알 마흐디와 동행하며 국사에 참여하였고, 수 차례의 군사 원정에 동참했던 아부 알 까심 무함마드 알 까임 비아므릴라에게 계승되었다. 알 까임은 부친의 팽창정책과 권력 강화정책을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는 다양한 대외 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면서 부친보다는 가혹한 통치자로 알려졌다. 사회적·경제적 불안감이 조성되면서, 알 까임의 통치 말기에 아부 야지드(Abu Yazid)가 이끌었던 카리지파 베르베르족의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 봉기는 새로 등장한 파티마조를 위협하고 전복시킬 정도로 매우 강력하고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아부 야지드는 베르베르족의 파티마조에 대한 경제적 불만을 활용하였으며, 파티마조 내부의 자나타와 산하자의 갈등, 순니파와 시아파의 갈등, 그리고 카리지파와 시아파의 갈등 등을 적절히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아부 야지드 무클라드 븐 카이다드(Abu Yazid Mukhlad b. Kaydad)는 자나타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바누 이프란(Banu Ifran) 가문 출신이었으며, 카리지파의 이바디파(Ibadiyya)의 주류였던 누카리 이바디파(Nukkari Ibadiyya)에서 공부하였다. 이 파는 수프리야파(Sufriyya)와 함께 온건 카리지파에 속했다. 그의 스승은 마그립 누카리 이바디파의 거두 아부 암마르 알 아으마(Abu Ammar al-A’ma)였으며, 그는 스승의 뒤를 이어 이 파의 이맘 겸 쉐이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바디파의 교리를 저버리고 정치 일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타하르트에서 교사로 활동한 후 고향인 이프리끼아 남부 가스틸리야(Qastiliya)로 돌아왔으며, 928년부터 반 파티마조 봉기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아우라스(Awras) 등지의 이바디파 자나타 베르베르족의 지지를 얻었으며, 대중적 인물로 성장하였고, 결국 누카리스 이바디파의 이맘 직위에 올랐다.
아부 야지드는 자나타 베르베르족이 자신을 지지하자 943〜944년에 파티마조에 대항한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944년 사파르의 까이라완을 점령하였으며, 이프리끼야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다. 북아프리카 말리키 순니파의 강력한 거점이었던 까이라완의 주민들은 처음에 카리지파의 시아파에 대한 반대 운동에 협력하였다. 그는 말리키 순니파에게 시아파 파티마조의 통치와 억압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카리지파 베르베르족의 유린과 약탈이 도를 넘어서자, 까이라완 말리키 순니파는 다시 파티마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런 와중에 칼리파 알 까임은 아부 야지드의 공격에 매우 방어적인 전략을 적용하였다. 알 까임은 자신의 군대를 3개 집단으로 분산 배치하여 아부 야지드 군대의 무자비한 살상 공격을 제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부 야지드 군대는 분산된 파티마조 군대를 쉽게 공략하였으며, 마이사르(Maysar) 사령관이 지휘하고 있었던 까이라완과 마흐디야 사이의 군대를 쉽게 공략하였다. 945년 1월 아부 야지드 군대는 칼리파 알 까임이 머물고 있었던 마흐디야를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파티마조 군대는 거의 1년을 버텼으며, 산하자의 아미르 지리 븐 마나드(Ziri b. Manad)의 도움을 받아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아부 야지드의 베르베르 군대는 점차 피로가 누적되었으며, 전쟁 중 호화로운 생활을 한 지도자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부 야지드는 까이라완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의 일상생활인 당나귀 타고 다니는 생활로 복귀하였다. 이후 그는 다시 카리지파 베르베르족의 인기를 회복하였으며, 튀니지와 이프리끼야 다른 지역에서 파티마조와 수 차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12년간 통치했던 알 까임이 마흐디야에서 946년 사망하자, 아부 야지드의 운명도 점차 쇠하기 시작했다.
알 까임의 후계자는 아들 이스마일(알 만수르 빌라, al-Mansur bi’llah)이었다. 그는 이프리끼야에서 태어난 최초의 파티마조 칼리파였다. 그는 아부 야지드가 폭동을 일으키고 있던 상황에서 권력을 계승하였으며, 처음에는 알 까임의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아부 야지드 군대의 반란에 대항하면서 공격전략으로 수정하였으며, 그를 추적하며 수개월을 보냈다. 알 만수르는 수사(Susa)에 있는 순니파 폭도들을 진압하였으며, 아부 야지드는 까이라완으로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까이라완의 주민들은 이미 아부 야지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상태였으며, 까이라완을 다시 장악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는 결국 946년 서쪽 지역에 잇는 잡(Zab)으로 후퇴하였다. 알 만수르는 까이라완을 정복한 후 아부 야지드 군대를 추적하여 투브나(Tubna)와 마실라(Masila) 지역에서 그의 군대를 격퇴하였다. 947년 알 만수르는 지리 븐 마나드 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키야나(Kiyana) 산에서 카리지파 베르베르족 군대를 마지막으로 격퇴하였다. 아부 야지드는 포로로 잡혔으나, 얼마 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파들(Fadl)은 아우라스 등지에서 저항을 지속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그도 사망하였다. 아부 야지드의 후손들은 결국 스페인의 우마이야조 압드 알 라흐만 3세에게 피난처를 구했다. 북아프리카와 시실리아에 대한 파티마조의 통치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던 알 만수르는 953년 사망하였으며, 장남 아부 타민 마아드 알 무잇즈 릿딘 알라(Abu Tamim Ma’add al-Mu’izz li-Din Allah)가 계승하였다.
4. 결론
파티마조의 등장은 정치적으로 바그다드 순니파 압바스조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의미, 사상적으로 시아 이스마일파라는 외래 사상이 도입되어 국가 개혁을 시도했다는 의미, 문화적으로 북아프리카를 베르베르 문화로 통일했다는 의미, 종교적으로 시아 이스마일파를 북아프리카의 주요 종교로 통합했다는 의미, 그리고 종합적으로 순니파 압바스조 중심의 이슬람 세계에서 새로운 지도력을 장악하고 도전을 시작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집트가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는 파티마조 시기부터였다고 말할 수 있다.
파티마조는 약 260년 동안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모술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통치하였으며, 바그다드의 압바스조나 스페인의 우마이야조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파티마조가 초기에 방대한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아프리카의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포용뿐만 아니라 종교적 관용 정책의 효율적 운용이 있었다. 파티마조는 시아 이스마일파의 사상을 근거로 초기 정권을 수립하였지만, 당시 북아프리카에 널리 전파되었던 말리키 순니파와 카리지파 순니파에 대해 적대적인 대응보다는 화해와 화합을 추구하였다. 순니파와의 화해 정책을 바탕으로 정치적 인정을 이룩한 파티마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와 유대교인을 포함한 딤미들을 모두 인정하는 종교 관용 정책을 추구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파티마조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알 하킴의 종교 차별정책과 딤미 탄압정책 그리고 정치적 억압정책은 파티마조의 통치권을 약화시켰고, 결국 통치권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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