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Focus _ 레바논: 화해와 상생의 다원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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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4,385 조회 날짜 19-05-30 12:46내용
레바논: 화해와 상생의 다원문화 시험장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 안정국
얼마 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한국과 레바논 축구 국가대표팀 간에 2014년 월드컵 예선경기가 열렸다. 레바논의 국내외 정세가 워낙 위태로워서 ‘붉은악마’도 원정 응원을 취소했다고 한다. 시합 당일 경기장 주변의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를 보니 ‘경기장 주변은 살벌 그 자체다.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레바논 정규군들이 엄중하게 검문검색을 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와 무장병력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군인들은 서로 농담을 하며 웃고 있었지만 소총에 실탄이 장전된 상태였다’고 한다. 곳곳에서 유혈 무력충돌이 벌어져 사망자까지 여럿 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는 터이니 우리나 그들이나 방비를 단단히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 동안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동지역에 갈 때 여행자보험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레바논이나 시리아, 이란 같은 나라가 여행일정에 포함되면 보험 가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레바논대학교 학생으로 6년 넘는 기간을 살았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들러 고마운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찾아뵙고는 했는데, 언제 그곳이 그렇게 위험한 곳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내가 베이루트에 살 때에도 이스라엘이 공습을 해온 적이 있었고, 누군가는 자동차 폭탄 테러로 생명을 잃기도 했다. 사람들이 농담 삼아 ‘경호차량이 붙은 차들만 피해 다니면 아무 문제없다’고 말하고는 했으니 –나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그 때도 레바논이 꽤나 불안한 나라였던 건 사실인 것 같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다양한 종교종파가 공존하며 한 때 다원주의의 성공모델로 칭송을 받았고 한순간 그 균형이 깨지며 모자이크 사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던 레바논. 이 나라의 수도 베이루트는 그야말로 종교의 전시장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네마다 서로 다른 종파의 이름을 가진 교회와 모스크들이 있고, 각 종파에서 운영하는 학교들이 있다. 베이루트의 ‘다우라’ 쪽으로 가면 치마를 입은 아르메니안 정교회 여성들을 볼 수 있고, 외곽 쪽의 ‘알레이히’에 가면 엉덩이 쪽이 펑퍼짐한 검정바지를 입은 드루즈파 남성들을 볼 수 있으며, 시아파가 많이 사는 남쪽 교외지역에 가면 이란풍 검정 차도르를 쓴 여성들과, 이란풍의 노타이 차림을 한 남성들을 만나게 된다.
레바논은 높이 2000-3000m에 이르는 무척 높은 산맥을 가지고 있다. 워낙 산맥이 높아 여름에도 눈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예로부터 박해 받는 사람들이 피하기에 딱 좋았다. 역사적으로 7세기 후반부터 레바논 산중은 시리아의 피압박 종파 및 소수민족의 피난처가 되었고, 각 피난 집단은 오랜 세월 동안 정치적․사회적․종교적으로 분리, 고립되어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그대로 살아남아, 지금 레바논의 독특한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레바논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투쟁하는 데 익숙하다고 말한다. 레바논의 시작이 바로 자유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억압에 대한 저항은 레바논 사람들의 역사와 핏줄에 흐르는 기질이 되었다고 믿는다.
내게 베이루트의 첫인상은 별달리 낯설 게 없었다. 새로 지은 듯한 공항은 작지만 깨끗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다양하고 다채로웠으며 또한 자유로움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에 이르는 길도 새로 포장한 듯 아스팔트의 빛깔이 생생한 검은색이었다. 그 때가 2000년 2월 이었으니 십육 년을 끌던 내전이 끝나고 딱 십 년이 지나가는 즈음이었다. 활기찬 레바논사람들의 모습에서 내전의 그림자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도시 곳곳 나라 전체에 여전히 내전의 상처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도 소총이나 기관포 자국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레바논의 열악한 대중교통 사정도 눈에 보이는 상처 중 하나였다. 엄청난 규모의 재개발사업이 계속되고는 있었지만, 신호등은 새로 정비된 시내에나 가야 두어 개 볼 수 있었고, 공중전화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가로등도 켜기 힘든 전기 사정, 복구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철도, 이틀에 한 번 나오던 수도 등등 내전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것만 같은 엉망진창 인프라였지만 서서히 하나하나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한 복구의 과정을 거치면서 레바논 전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일들이 가끔 나를 즐겁게 했다. 예를 들어, 신호등.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신호등이 “작동”하다니 또다른 혁명적 변화가 하나 일어난 것이었다. 작동되는 신호등을 수십 년 만에 본 베이루트 시민들과 교통경찰관들이 적잖이 당황해 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고는 했다. 신호등과 차선 없이 운전하는 데 워낙 익숙한 사람들이라 어지간하면 신호등을 무시하게 마련이고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위험한 상황들이 속출했다. 그래서 교통경찰관 또한 신호등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신호등에 맞춰 ‘멈추시고 가시라’고 수신호를 해야만 했다.
또 한가지. 레바논에 처음 와서 가장 황당했던 건 공중전화가 없다는 거였다. 어디에 전화 한 번 하려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공항에도 공중전화가 없었으니까. 공중전화 대신에 보통 식료품점 같은 곳에서 몇 백원 정도의 돈을 받고 빌려주는 일반전화를 이용했다. 그런데 2004년에 들어서 거리에 하나 둘씩 공중전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공중전화 카드를 사서 전화를 하는데 기분이 정말 묘했다. 너무나 절실히 필요한 것이기도 했거니와, 말하자면 ‘휴대폰 이후 공중전화가 출현’한 ‘시점 불일치’ 때문이었다.
내전으로 폐허가 됐던 시내 중심가가 새로이 복구되어 일반에 분양되기 시작한 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하지만 워낙 가격이 높아서인지 깨끗이 단장된 중심가는 마치 유령마을처럼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삼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카페가 들어서고 식당이 문을 열자 갑작스럽게 베이루트 시민들의 발길이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베이루트 시민들이 몰려들자 외국의 관광객들도 이곳으로 찾아와 베이루트의 ‘원래 멋과 맛’을 즐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벌어진 9.11사태로 걸프지역 석유부국 사람들이 가깝고 편안한 레바논으로 발걸음을 돌린 탓도 있다. 한순간에 베이루트의 겉모습이 확 달라졌다. 쇼핑가가 화려하게 단장해 되살아나고 대형 쇼핑센터며 고급 휴양리조트가 곳곳에 들어섰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레바논 곁을 지나던 외국여행객들이 베이루트에 한 번씩 들러 가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고속도로가 재개통되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산길엔 다리가 놓여 한결 가는 길이 수월해졌다.
하지만 이런 생동감 넘치는 변화의 과정에도 위기는 끊이지 않았다. 2005년 라피크 하리리 총리 암살로 인한 소요, 2006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사이의 전쟁은 레바논의 안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약한 토대 위에 구축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3년 현재 시리아 내전을 둘러싼 레바논 내부의 무력충돌과 헤즈볼라의 시리아 내전 개입은 레바논을 또다시 위험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내전의 상처를 딛고 화해와 상생의 다원문화를 희구하는 레바논 시민들은 이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고 번영과 안정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랍의 봄”의 연장선 상에서, 지금 시리아는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 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시민 봉기가 성공하여 기존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 세워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의 지금 모습 또한 혼돈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과 혁명의 끝은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사건이 발전해 가는 과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건의 해결 과정은 전쟁이 끝나야 시작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독일의 통일과정을 연구하여 미래의 남북한 통일에 대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련 속에 사회변혁과 통합의 과정을 걸어가고 있는 아랍 여러 나라들은 레바논의 경우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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