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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결국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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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40 조회 날짜 21-08-3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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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역사, 결국 시간이다.



김정하(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흔히, 우리는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한다. 사고(思考)와 이론을 배우고 어느 역사가가 무슨 말을 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려 한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겠지 하면서 일단은 그들의 언어와 내용의 의미를 머릿속에 넣으려고 한다. 게다가 어느 자리에선가 머릿속 기억의 일부를 떠올려 말하고 나면 역사의 진지함을 자신의 학문성으로 착각해 작은 전율(戰慄)을 경험한다. 

“배우고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悅乎).” 무엇을 배운다는 것일까?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일까? 게다가, 배우면 무엇이 즐겁다는 것인가? 난 “사람을 배운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이하기 싫은 대상이라는 사실을. “사람이 싫다. 사람이 싫어!”라고 하지 않는가? 하루에도 여러 번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의 진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답”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싫다면 그와의 대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싫어 고개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면, 비난을 쏟아내도 시원하지 않다면 이 또한 답이 아니다. 사람이 싫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정작 싫은 본심을 은연중에 드러낸다면 이 역시 사람이 취할 행동이 아니다. 그럼, 사람이 답이라는 명제는 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어쩌면 타인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눈빛에서 나와의 유사성을 찾으려 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작은 손가락 구멍이 거대한 댐을 붕괴시키듯이 -유사성의 함정에 빠진 채- 결국에는 사람이 싫다는 말을, 경험을 통해 얻은 쓴 약(藥)인 양 생각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타인과의 교류에서 갈등과 대립 그리고 분쟁의 모습과 감정에 집착하면서 그 이면의 시공에 존재하는 협력의 실마리에 관심을 두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분명, 사람에 대해 의견을 가짐에 있어 주고받는 논리보다는 일방통행의 습관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자신의 무한한 역할의 가능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자(賢者)는 사람에 의견을 가지되, 또한 이를 가지지 말라고 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사람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는 역사이며,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일 때 비로소 역사의 동물이 된다. 사람은 그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기질과 성격도 나이와 삶의 성숙함도 각양각색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인간은 우주의 원정이정(元亨利貞)처럼, 사람에게서 태어나 가정(家庭)에서 자라며 사회에 나아가 삶의 춘하추동(春夏秋冬)을 따른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사회생활에서도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순환을 따르며,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고 깨뜨리기를 반복한다. “사람이 답이다.”라는 명제의 깊이는 우리가 사회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타인과의 다양한 관계에서 자신의 성격에만 집착하지 않고 타인의 타고난 기질에 함께 어울려 가변(可變)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의 변화무쌍(變化無雙)을 깨닫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진의(眞意)이다. 이 모든 것의 궁극(窮極)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서 세대를 반복하고 사람을 달리하면서 이루어가는 교류에 모아진다. 헤겔의 변증법(辨證法)은 정-반(Thesis - Antithesis)의 상극(相克)구도에서 합(Synthesis)이 만들어짐을 가리킨다. 하지만 타인과의 교류에서 우리의 역할이 상극에만 있지 않음에 그의 주장에서는 상생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이 안타깝다. 헤겔의 역사에서는 직진(直進)하는 시간만이 보일 뿐이다. 그에게는 동체음양(同體陰陽), 이체음양(異體陰陽)의 의미가 무색하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역사철학과 대동소이하게, 시간의 순환, 즉 무한 반복의 순수함을 말했다. 무슬림 역사가인 이븐 칼둔(『무깟디마』)도 역사의 시간을 왕조의 흥망성쇠로 설명했지만, 시간의 순환적 반복을 배경으로 우리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기존의 균형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균형을 지향하며 그 과정에서 변화의 여러 양태가 가시(可視), 비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에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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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순환론의 시간 인식 


우리는 시간을 볼 수 없으며 그렇기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시간의 움직임이 직선인지 순환의 궤적인지를 논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선의 인식과 순환의 인식 간에는 정의(正義)와 균형(均衡)의 큰 차이를 극복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순환의 시간 인식은 우리의 역사가 년, 월, 일, 시, 분, 초 등의 반복적인 흐름에 따라 다양한 공간들에서 전개되는 상극(相剋)과 상생(相生)의 공생(共生)에서 비롯된다는 발상에서 유래되었다. 차이가 클수록 변화의 역동성도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싫은 사람이 많을수록 그만큼 삶이 꼬이고 힘들어진다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나와의 차이가 클수록 사회에서 풀어가야 하는 대인관계의 역동성도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항상 좋은 사람도, 항상 나쁜 사람도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누군가의 미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우리의 역사에는 후자의 두 경우만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의 두 가지 현실도 병존한다. 다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의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정의와 균형의 개념 중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우리의 시간 인식을 넘어 역사 인식을 결정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태도를 설정하는 나침판으로 작용한다. 균형은 상보적 관계의 공존이며 정의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다. 역사를 배우는 의미와 목적을 어떻게 판단하는가는 결국 우리의 시간 인식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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