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Culture _ 반목의 시대 지중해를 가르는 영화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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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목의 시대 지중해를 가르는 영화제 이야기
주현진(충남대학교, lelliaju@hanmail.net)
“오, 문명의 바다여!”
자유로운 인간 조르바를 창조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926년에서 그 이듬해까지 이탈리아, 이집트, 시나이 반도,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면서 지중해 세계를 기록하였다. 『지중해 기행』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그의 여행일지를 읽어 내려가면, 청록의 색채가 시야를 가리는 환영에 사로잡히고 영혼의 청력이 페르낭 브로델의 외침을 흡입하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 “오, 문명의 바다여!”
신화와 역사가 뒤섞여 꿈틀대는 세계, 지중해. “땅 한가운데”라고 모순되게 불리는 바다 지중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향과 지향이 다른 문명들이 교류함과 동시에 충돌한 세계이다. 영겁에 비유될 만한 긴 세월동안 축적된 지식의 스펙트럼을 통해 지중해를 들여다보면, 문학과 역사란 거대한 숲이 그 배경으로 펼쳐진다. 서양문학의 시작이자 서양문화의 전범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떠받치고 있는 고대적 세계관은 지중해이다. 아가멤논과 동맹을 맺은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등 그리스 영웅들이 트로이를 향해가기 위해 건넜던 바다가 지중해이며, 또한 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죽음과 함께 트로이를 함락하고 승전보를 울린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케 섬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통과해야만 했던 바다가 지중해이다. 이처럼 그리스신화의 유일한 세계였던 “땅 한가운데”는 영웅들의 형형색색 찬란한 서사에 가려진 듯하지만, ‘쪽빛 푸름’으로 그 위대한 서사를 광활하게 품고 있다.
지구 상 어떤 바다도 소유하지 못한 빛깔을 지닌 “문명의 바다” 지중해는 자신만의 고유함을 일으켜 세운다. 고유함은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수많은 이야기들이 잉태된 유일한 영토인 까닭이고, 인류가 이룩한 동·서양 문명의 실존적 근원이 펼쳐진 세계인 까닭이고, 또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문화에 수많은 소재들을 제공하는 사유의 보고인 까닭이다. 신들의 속삭임으로부터 시작된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노래와 멜로디는 저 쪽빛 푸른 지중해 위를 방랑하다가 “땅 한가운데”를 관통하면서, 지중해만의 색채와 빛으로 조형되었다. 그리고 지중해를 휘감고 있는 영토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우룩(이라크)에서 인류사상 최초로 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우고, 질그릇을 구우면서 삶의 조건에 대하여 최초로 인식한 사람들이 출현하였고, 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개화되었다. 이렇듯이 “문명의 바다” 지중해는 인류 생존의 바다이다. 그런 까닭에 “땅 한가운데”를 욕망하는 패권주의자들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거르지 않고 출몰하였던 것이리라. 또한 그런 까닭에 패권을 욕망하는 자들로 인하여 지중해는 이따금 혼란의 바다로 일렁거렸다. 고대부터 시작된 이 일렁임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문명들 간, 세력들 간의 반목과 충돌로. 사실, 이것은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를 등에 업고 지중해를 통과하여 크레타로 건너갔을 때부터 예정된 지중해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미케네 문명과 레반트 문명의 싸움이었던 트로이 전쟁부터, 지중해는 문명들이 충돌과 반목을 통해 서로를 관통하는 현장이 되었던 것일까? 어쨌든 지중해는 굴곡진 역사 속에서 패권을 욕망하는 자들로 인하여 때로는 충돌과 반목으로, 때로는 화합과 연대로 변신해가며 현대에 이르렀다.
반목의 시대에 놓인 지중해
과학기술의 발달, 새로운 문화지평의 형성, 새로운 예술장르의 탄생 등등 인류문명의 현란한 비상이 실현된 현대, 또한 두 차례 세계대전이 발생한 현대에 이르러, 지중해 세계는 “문명의 바다”와 혼돈의 바다 사이를 오가며 ‘실존’을 꾸준히 증명해왔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지중해를 소환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들조차 사치가 될 정도로 지중해는 삶과 죽음의 잔혹한 형상을 그리는 바다로 부각된다. 2015년 이래로 시리아 난민들과 아프리카 난민들의 더욱 격렬해진 생존투쟁 현장이 되어버린 지중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잔혹극을 잠시 잊고, 지난 세기 지중해가 겪었던 또 다른 잔혹극의 편린을 들춰보도록 하자.
찬란한 쪽빛과 무한이 펼쳐지는 광활함으로 표상되는 지중해, 필자에겐 이국의 바다이기 이전에 추억과 몽상 사이의 어느 지점에 꽂혀 있는 우편엽서 같은 것이다. 낭만적이면서도 모호한 이국이었던 프랑스에 대한 환상으로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 필자에게 유럽은 1992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영화 <지중해>였다. 오비디우스, 키케로, 단테라는 이름들을 애써 외우고 세익스피어, 발자크, 스땅달, 헤세를 읽으면서 환상적 꿈의 세계로 도피하던 청소년기의 몽상에 투영된 유럽은 쪽빛 바닷물이 일렁이는 지중해에 맞닿은 영토였다. 그래서인지 전쟁이라는 현실을 잊고 몽환의 섬을 향유하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중해> 영화처럼, 청년기의 지중해 또한 이미지들의 뒤섞임으로 그려지는 어렴풋한 세계일뿐이었다. 그 세계는 1997년 유학을 목적으로 프랑스에 가서 만난 클로드 무샤르 선생님으로부터 장 제(Jean Zay)와 칸 영화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지중해는 막연하게 혼합된 자본주의적이거나 통속적인 이미지일 뿐이었다.
반파쇼를 위한 투쟁, 칸 영화제
급진사회주의자였던 장 제는 사회적·정치적 인물이기 이전에 무샤르 선생님의 장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프랑스를 이끌었던 인민전선(Front populaire) 정부에서 장 제는 교육문화부장관으로 재임하였고, 1940년 나치 독일에 협력한 비쉬(Vichy) 정부에 의해 체포당해 투옥되었다가 1944년 비시 정부가 레지스탕스 척결을 위해 세운 민병대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 몇 줄의 서술이 장 제의 파란만장한 삶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삶이 그려낸 궤적의 무게를 어렴풋하게나마 전달해준다. 그리고 2015년 장 제의 유해가 팡테옹(Panthéon)에 안장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삶이 어떤 차원에서 국가와 국민에 헌신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장 제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인물로서 다수의 프랑스인들이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행정가, 프랑스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 그리고 칸 영화제를 탄생시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특히, 칸 영화제 창립에 관하여 장 제는 교육문화부 장관으로서 정책결정자 역할을 하는 정도로 칸 영화제의 탄생 배경에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이 지나가고 역사에 드리워진 장막이 걷히자, 장 제가 칸 영화제를 창립한 목적의 상세한 동기가 드러났다. 칸 영화제 창립은 문화정책의 일환이 아니라, 당시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던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실천이었다. 필자는 이 진실이 드러난 과정에 대해 책이나 대중매체를 통해 안 것이 아니다. 장 제가 투옥된 상태에서 출생한 그의 차녀 엘렌느 무샤르-제(Hélène Mouchard-Zay) 즉, 스승님의 부인으로부터 그리고 상세한 설명은 스승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1932년에 창립된 베니스 영화제(La Mostra de Venise)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예술박람회인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 부문으로 창립되었다. 1895년 영화라는 새로운 현대문화 장르가 탄생한 지 30여년이 지나서 비로소 예술의 한 장르로 영화가 그 위상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숭고한 도약을 꿈꾸는 세계 예술가들과 영화인들은 1934년 이래로 매년 9월 지중해가 품은 작은 바다 아드리아 해변으로 몰려든다. 베니스 영화제는 지중해 세계를 문화예술의 현란한 빛깔로 입혀주는 중요한 축제이다. 그러나 칸 영화제 창립 의지가 발현된 해인 1938년의 베니스 영화제는 나치즘과 파시즘의 포로가 되어 히틀러와 무솔리니 예찬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현장이었을 뿐이었다. 1938년 9월 베니스 영화제 마지막 날, 심사위원회는 만장일치로 미국영화를 영화제 최고상인 “무솔리니 컵(Mussolini Cup)”의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히틀러의 개입으로 주축국 심사위원들에 의해 뒤틀려져 독일 다큐멘타리 <경기장의 신들>과 이탈리아 영화 <파일럿, 루치아노 세라>가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온 심사위원들은 이 결과에 반발하여 수상작을 공표하기도 전에 사퇴하였다. 그리고 영화제에 참석한 프랑스 교육문화부 측 고위관료 필립 얼랑거(Philippe Erlanger)는 베니스 영화제의 폭압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제가 창립되어야함을 깨달았다. 이 위대한 생각은 곧 그의 상관이었던 교육문화부 장관 장 제에게 보고되었고, 장관은 생각을 실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와 같이 칸 영화제는 나치즘과 파시즘의 홍보용 도구로 전락해버린 문화예술을 구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파쇼에 대항하는 외침으로 창립되었다. 제1회 칸 영화제는 1939년 9월 1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될 예정이었고, 독재자 히틀러에게 전쟁을 포기하라는 경고로서의 영화제 또한 휴머니즘을 회복하기 위한 영화제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칸 영화제가 준비되는 동안에 독일 나치 정권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1939년 8월 29일 칸영화제 개막은 취소되었고,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선포되었다.
사회적 연대와 참여를 위한 지중해
칸 영화제가 기획된 지 8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2019년 9월 1일 장 제의 고향 오를레앙에서 제1회 칸 영화제가 개최되었다. 첫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대된 29편의 영화들이 오를레앙 시립극장과 카르멜영화관(Cinéma des Carmes)에서 상영되었다. 월트 디즈니의 <위대한 퍼레이드>, 빅터 플레밍의 <오즈의 마법사>, 프랑크 카프라의 <의회에 간 미스터 스미스>, 줄리앙 뒤비비에의 <불한당 귀신>...
엘렌느 무샤르-제는 “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미지는 가공의 프로파간다 도구로 이용될 수 있기에 나치주의자들과 같은 지형에서 그들의 프로파간다에 대응할 필요가 있음을 아버지가 인식하였던 것”이라고 덧붙인다.
아름답게 푸르고 우아하게 요동치는 지중해를 더욱 빛내주는 베니스 영화제와 칸 영화제는 이처럼 상이한 (정치적) 의도에 의해 탄생하였다. 오늘날 영화가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소통과 교류 그리고 오락의 기쁨과는 거리가 먼 탄생동기이다. 문화예술 장르로서 영화를 향유하기까지, 현대 인류는 이념적 대립과 사상들의 충돌 그리고 경제적 격차에서 파생된 반목의 시대를 격렬하게 관통해왔다. 21세기인 오늘날 지중해 세계를 빛내주는 두 영화제는 반목의 시대 서로 대립하였던 과거와는 달리, 세계 문화예술의 상징이 되어 서로 지원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땅으로 질주하는 태양빛이 지중해 쪽빛 푸르름을 물결치게 하고 해변의 하얀 모래알들을 더욱 더 창백하게 물들일 때면, 세계 곳곳의 영화인들이 칸으로 베니스로 몰려오는 계절 5월인 것이고, 9월인 것이다. 프랑스 오베르뉴지방에서 불어오는 미스트랄이 휘몰아쳐 지나가도 지중해는 결국 그 푸르름을 뽐내며 고요함 속에 안착할 것이다. 더 이상 문명도 이념도 충돌과 반목의 주제가 되지 못하는 21세기 지중해 세계를 찾아드는 주제는 무엇인가? 생존의 터를 찾아 지중해를 건너려고 몸부림치는 아프리카 난민들과 시리아 난민들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관심이어야 할까? 혹은 인류애를 지켜내기 위한 사회적 연대와 참여의 주제여야 할까? 어려운 문제이다. 그럼에도 지중해 세계에 부과될 새로운 주제를 짐작하며, 페르낭 브로델이 『지중해의 기억』에 남긴 문장을 떠올리며 이 단상을 마감한다 ― “지중해는 우리를 위해 과거의 경험들을 재현해내고, 그 경험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따라서 그 경험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하늘 아래와 풍경 안에서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