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S Culture _ 고대 로마의 문법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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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중해지역원 조회 22,034 조회 날짜 19-06-05 16:36내용
고대 로마의 문법 교육 (이 글은 2016년 10월 21일 부경대학교 해양인문학연구소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임을 밝힌다.)
장지연(지중해지역원 HK교수, email : jyjang@bufs.ac.kr)
1981년 영국에서 처음 개최된 후 매년 전 세계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열리는 세계 대학생 토론 대회(The World Universities Debating Championship)는 그 전통에 있어서나 참여 대학생들의 열정과 수준에 있어서나 가히 대학생 토론 대회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두 개의 팀이 각각 찬반을 즉, 서로 반대의 입장을 논하는 형식을 취하는 이 대회는 크게 영국 의회 토론 방식과 미국 의회 토론 방식으로 나뉘는데, 이 두 방식은 각 팀의 구성원 수와 발언 순서에 있어서 차이를 가질 뿐 대결하는 두 팀 중 한 쪽은 찬성(pro)의 입장을 취하고 다른 한 쪽은 반대(contra)의 입장을 취하는 형식은 동일하다. 이 대회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이 대회가 서양의 토론 문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토론 교육의 전통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토론의 기술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설득의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설득의 기술은 이미 중세 유럽의 대학교에서 삼학(trivium)의 한 과목인 수사학(rhetorica)에서 가르쳐졌을 뿐만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언어 교육에서 중점적으로 가르쳐진 과목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언어교육은 세 분야로 나뉘어 행해졌는데, 문법학(grammatica), 수사학(rhetorica), 논리학(dialectica)이다. 이 세 과목 중 제일 먼저 학생들이 접하는 과목은 문법학이었는데,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법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측하는 문법학의 내용과는 다소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해당 언어의 기초적인 문법을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 세밀히 살펴보면 문법 교육의 목표가 기초 문법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수사학 교육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서양 고대 문법학이 지닌 고유한 특성으로, 비록 고대 문법학이 중세 이후 유럽의 기초 문법교육의 틀을 제공하기는 하였으나, 문법 교육의 목표에 있어서는 그 이후 시대와는 사뭇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틴어 문법학은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발생하여 유럽 학문체계의 기초가 된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이 천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졌다. 비록 ‘문법학’(Ars Grammatica)이 더 이상 독립된 학문 분과로 간주되고 있지는 않지만, 문법학이 중세 유럽 대학의 인문교육 교과과정(artes liberales)의 한 과목으로 그 지위를 공고히 유지하였으며 현대 언어학의 발전에 기초적인 자양분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틴어 문법학의 영향은 무엇보다도 현재 서구에서,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문법 교육과 문법 서술 양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법 교재의 목차를 보면 (특히 영어와 프랑스어 같은 서양어의 경우에) 고대에 사용되었던 라틴어 문법서와의 구조적인 유사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고대 라틴어 문법학이 현대 문법 서술의 틀을 제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문법 사항에서 적지 않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대상 언어가 라틴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라틴어 문법학과 그로 대변되는 문법 교육의 지향점이 시대에 따라, 그리고 사회적 요구에 따라 변화했다는 점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천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라틴어 문법학은 처음 발생하였던 고대 당시의 기본적인 형식을 큰 틀에서 유지하면서도 적지 않은 변화를 보이며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라틴어 문법 교육의 목적의 변화에 상응한 결과이다.
<Luca della Robbia, Priscian, or the Grammarian (1437-1439). Marble panel from the North side, lower basement of the bell tower of Florence, Italy. Museo dell'Opera del Duomo>
고대의 라틴어 문법학은 일상적인 차원의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수사학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사학과 문학 교육에 선행하는 기초 학문으로서의 고대 라틴어 문법학이 지닌 특성은 고대에 널리 통용되었던 문법학의 정의와 문법서들의 내용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1세기 로마의 대표적인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Marcus Fabius Quintilianus)는 문법학을 ‘올바르게 말하는 것과 시인들을 해석하는 것에 대한 학문’(scientia recte loquendi et poetarum enarratio)으로 정의하였으며, 이 정의는 고대에 사용되었던 라틴어 문법서들의 내용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구체적으로 고대 라틴어 문법 서술의 특징으로 (1) 읽기와 쓰기—소리(vox)와 문자(littera)—가 내재적으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단위로 간주되었고 (2) 품사론이 의미에 따른 분류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3) 단어의 마지막 음과 마지막 음절의 소리와 장단 여부에 대한 설명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 언어를 배우기 위해 펼쳐보는 문법서에서는 기대하지 않는 내용들이다.
라틴어 문법학의 정의로 고대부터 제일 널리 사용되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로마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의 정의이다. 수사학 교사이기도 하였던 그는 저서 『연설가 교육』(Institutio Oratoria)에서 문법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Haec igitur professio, cum brevissime in duas partes dividatur, recte loquendi scientiam et poetarum enarrationem, plus habet in recessu quam fronte promittit. Nam et scribendi ratio coniuncta cum loquendi est et enarrationem praecedit emendata lectio et mixtum his omnibus iudicium est; (Quintilianus, Institutio Oratoria, ed. by M. Winterbottom, I.4.2-3)
따라서 비록 이 학문이,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올바르게 말하기에 대한 지식과 시인들을 해석하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이 학문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글쓰기의 원칙은 말하기의 원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올바른 읽기는 해석을 하기에 앞서서 행해지며, 이 모든 과정들에는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문법학의 영역을 ‘올바르게 말하기와 시인들을 해석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과 글쓰기와 말하기를 연결시키고 올바른 읽기와 문학 작품의 해석을 연결시키는 것 자체는 현대 언어교육과 비교하여 볼 때 그다지 특이한 설명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된,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설명된 ‘말하기와 글쓰기’, ‘읽기와 해석’이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와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Martianus Capella, Noces de Philologie et de Mercure La Grammaire et son amphithéâtre d'élèves Commentaire partiel de Rémi d'Auxerre Italie (?), Xe siècle, Source BnF, Manuscrits, Latin 7900 A fol. 127v>
고대 라틴어 문법학에서 ‘소리’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vox이다.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사람이 발성하는 소리, 목소리’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문법학에서는 vox를 모든 종류의 소리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다음 인용문은 고대 후기의 대표적인 문법학자 도나투스(Donatus)의 vox에 대한 설명부분이다.
Vox est aer ictus sensibilis auditu, quantum in ipso est. omnis vox aut articulata est aut confusa. articulata est quae literris conprehendi potest, confusa quae scribi non potest. (Donatus, Ars Maior, ed. by H. Keil, p. 367)
소리는 청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딪혀진 공기로, 그것이 그 안에 있는 정도만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소리는 나누어진 것이나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누어진 소리는 문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고, 나누어지지 않은 소리는 (문자로) 쓰일 수 없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vox를 발화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청각으로 인지되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을 더 나아가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두 종류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분절된 소리’라는 개념인 articulata가 문자(littera)로 쓰일 수 있는 것으로 등치되어 설명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소리의 문자화, 즉 기호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라틴어 문법학에서 ‘문자’는 세 가지 속성, 즉 이름(nomen), 형태(figura), 소리(potestas)를 가진 개념으로 사용된다. 소리를 상징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소리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articulata vox와 littera, 그리고 이것들이 확장된 읽기와 쓰기는 표현 방식에 있어서만 차이를 보이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품사론은 고대 라틴어 문법서에서 제일 큰 비중을 두고 논해지는 부분이다. 8품사 체계는 고대 말에 확립된 이후로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라틴어 문법서의 품사론에서는 각 품사가 문장 내에서 수행하는 기능, 즉 구문론적 설명은 거의 없다. 고대 라틴어 문법학자들은 각 품사가 지닌 문법적 속성(accidentia)과 각 품사에 속하는 단어들의 의미와 형태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각 품사에 대한 설명이 간략한 정의와 문법적 속성 열거에 이어서 의미에 따른 하위분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나투스의 경우 명사를 의미에 따라 열다섯 개 이상의 종류로 분류한다. 품사의 기능보다는 의미론적인 접근, 즉 해석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라틴어 문법학의 품사론의 또 다른 특징은 각 단어의 마지막 음 또는 마지막 음절에 대한 설명이 두드러진 다는 점이다. 각 품사에 속하는 단어를 의미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덧붙여 마지막 음 또는 음절에 따라 분류하며 이 음들의 장단을 하나씩 설명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어미변화를 하는 품사들, 특히 명사와 동사의 경우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고대 말 문법학자 프리스키아누스의 문법서 『명사, 대명사, 동사 교육』(Institutio de Nomine et Pronomine et Verbo)에서 1군 명사 주격 어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Habet ergo primae declinationis nominativus litteras quidem terminales duas, a et s, terminationes vero tres, a as es productam, ut haec syllaba huius syllabae, hic Aeneas huius Aeneae, hic Anchises huius Anchisae. (Priscianus, Institutio de Nomine et Pronomine et Verbo, ed. by M. Passalacqua, p. 4)
따라서 1군 명사의 주격은 두 개의 마지막 음, 즉 a와 s를 가지고 있는, 세 개의 마지막 음절 a, as, 장음 es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syllaba’, ‘Aeneas’, ‘Anchises’가 있다.
단어의 마지막 음의 장단은 글을 쓰거나 시를 읽는 데에 (낭송하는 데에) 반드시 지켜야할 사항이다. 이는 라틴어 문법학에서 가르치고자 했던 읽기와 쓰기가 낭송과 연설 그리고 문학적, 수사학적 글쓰기를 의미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이다.
고대 라틴어 문법학은 기초적인 언어교육, 즉 문자해독력(literacy) 교육이 아니라, 수사학을 학습하기에 앞서 이루어졌던 엘리트 교육의 기본 과정이었다. 수사학적 글쓰기는 묵독이 아니라 청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음의 장단을 지키는 정확한 소리와 의미상의 적확한 표현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건이었다. 또한 주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문학 거장들의 작품에 나오는 표현들은 의미적으로, 운율적으로 적재적소에 사용될 때만이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올바르게 말하기와 문학의 이해라는 문법학의 정의는 연설하는 능력이 사회․정치 활동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질로 요구되었던 로마에서 수사학을 위한 고급 문법 교육이라는 문법학이 수행했던 임무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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