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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S City _ 12월의 끝, 크리스마스를 잊은 이스탄불에서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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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지중해지역원 Hit 4,757 Hits Date 19-06-0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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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끝, 크리스마스를 잊은 이스탄불에서의 일상


백미진(지중해지역원 차세대연구원)


터키의 이스탄불. 사실 내가 이스탄불에서 12월의 마지막 10여 일을 보내기로 결정한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내 친구이자, 동시에 항상 영감을 주는 언니인 ‘셀다’ 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전에도 카파도키아, 페티예 등을 목적지로 한 터키 여행을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스탄불’을 여행지로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셀다는 나에게 이스탄불 방문의 목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연수 도중 만나 6개월의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인 셀다는 터키의 고대문헌과 역사를 연구하는 친구였다. 같이 공부하던 반에 몽골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형제와 다름없이 잘 지냈고, 사이프러스 친구들과 평소에는 잘 지내다가도 역사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얼굴을 붉히면서 싸우곤 했다. 신기하게도 가수나 영화배우 사진이 아닌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방에 걸어 두었고, 영국에서 함께 공부를 할 때에는 영국의 간단한 아침식사에 대해서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 일요일의 아침식사에서는 특히 더했는데, 어떻게 일요일 아침에 시리얼을 먹을 수 있는가. 터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는 것이 그녀의 주된 불평 내용이었다. 2013년 5월에 터키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그 이후 계속된 민주화 움직임의 소식은 우리가 지내던 곳에도 끊임없이 뉴스를 통해 전해졌는데, 셀다는 먼 곳에서 친구들에게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는 사실에 슬퍼했다. 

셀다를 만난 이래로 나는 이 친구를 통해 이스탄불을, 터키를 보았다. 그리고 셀다는 나에게 작은 터키가 되었다. 2013년의 늦은 겨울, 이 방문을 통해 내 친구, 작은 터키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또한 그 일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었는데, 이 여행기는 그 나날의 몇 가지 기억들을 담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한 나는 출구로 나오자 마자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셀다를 발견했다.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고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셀다의 집으로 향했다. 공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보스포러스 다리를 건너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할 수 없지만 꽤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다.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평소에 유럽과 아시아를 먼 세계로, 이분법적으로 나눠 머릿속에 그려왔던 내가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스탄불에서의 둘째 날-술탄아흐멧 모스크(Sultan Ahmet Camii)


 이스탄불에서 맞는 아침. 간단하게 치즈를 듬뿍 넣어 구워낸 토스트에 꿀을 뿌리고 그린올리브, 블랙올리브, 파프리카를 속으로 채워넣은 올리브와 함께 먹었다. 바쁜 아침이었지만 터키식 커피인 이브릭(Ibrik)을 마신 뒤 셀다를 따라 이스탄불대학교로 나섰다. 셀다는 여전히 학교에서 들어야 할 수업이 있었기에 학교로 향했고 나는 셀다를 기다리는 동안 트램을 타고 이동해 구시가지 내 가까이 있는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과 술탄아흐멧 모스크(Sultan Ahmet Camii)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스크에 방문하는 날 무릎길이의 치마를 입었던 터라 모스크에 입장하기 이전에 입구에서 긴 치마를 빌려야 했고, 스카프로 머리를 감싸 몸을 단정히 한 뒤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사실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방문 이전에 책,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사진이나 영상으로 접했던 터라 그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실물은 더욱 더 웅장했고 정말 아름다웠다. 역시 2차원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3차원의 실물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양한 아라베스크 장식, 아랍어 캘리그라피 장식, 스테인드 글라스 이 모든 요소들이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한하게 반복되는 이 요소들은 나로 하여금 왠지 모를 신성함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과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장식들이지만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뤘는데, 나에게는 이 모습이 빛을 내며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나치게 화려함을 뽐내는 것은 편안함이 없다. 이 담담한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나를 편안하게 했고 나는 여기 가만히 앉아 머물렀다. 나는 엄마와 함께 와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았고,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한 편안함에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여행자를 보았고, 나이가 지긋한 할머님께서 나누는 미소를 보았다.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푸른 타일로 장식되었다는 이유로, 또는 어떻게 보면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쳐 만들어 지는 빛이 푸른색으로 보인다고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블루모스크라고도 불린다. 말 장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블루모스크를 슬픔 모스크라 불러도 될까? 사실 당시 나는 마음이 상당히 지쳐있던 터라 자주 상념에 빠지고 슬퍼하곤 했다. 왜, 행복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이나 고통은 나누면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나는 슬픔을 나누는 것에 지쳐있었다. 왜냐하면 정말 그런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나누어도 슬픔이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순간. 그리하여 나는 누구에게 나의 슬픔을 말하고 나누는 것을 그냥 자포자기 해버렸다. 그런 시기에 보낸 블루모스크에서의 두 시간은, 이 두 시간 동안 푸른빛과 편안함은 말없이 나의 슬픔을 토닥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슬픔으로 힘든 사람에게 이를 나누고 덜어내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는 아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가만히 머무르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그저 나를 토닥여주는 빛 아래 한참을 앉아 있었다.  

 블루모스크를 방문하는 목적은 다양할 것이다. 그 규모와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 친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등등. 나는 내가 위로 받았듯, 슬픔을 나누기 지친 사람들에게는. 푸른빛 무언의 토닥임이 블루모스크를 방문하는 목적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스탄불에서의 둘째 날-거리의 아이들


엉덩이를 겨우 떼고 블루모스크에서 나와 배가 고팠던 나는 앞에 위치한 광장에서 터키식 베이글인 깨빵, 시미트(Simit)를 들고 갓 짜낸 석류 쥬스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그런데 5살도 채 안된 듯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관광객들에게 티슈를 팔고 있었다. 사실 여행 중 오고 가며 거리에서 노숙자와 같은 행색의 이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구걸을 하거나, 작은 물건들을 팔았는데 이들은 시리아의 불안한 상황으로 인해 터키로 넘어온 시리아의 난민들이었다. 티슈구매를 권하던 아이들은 내가 사지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발요.(Please)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꺼지라는 나쁜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은 티슈를 팔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결국 나는 티슈를 샀는데 3명의 아이들에게 하나씩, 3개를 구매 해야 했다. 

내가 난민아이들의 눈에 들었는지 이후로는 가는 길 마다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셀다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어 나는 트램을 타고 이스탄불 대학교로 돌아와 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구걸하는 여자아이였다. 내가 돈을 주지 않겠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피했으나, 다른 아이들까지 합세했다. 결국 우스꽝스럽지만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그 아이들로부터 달렸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계속해서 달려 따라왔다. 결국 달리다가 지친 나는 멈춰 섰고, 따라오지 말라고 화난소리를 했다. 짧은 찰나, 목소리를 높이는 나의 신발에 한 아이가 엎드려 입을 맞추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피해 달린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고, 그 아이들의 절박함을 외면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또한 거기에 미안한 마음까지 합쳐져 매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비단 그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에 대하여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나에게 누군가가 내리는 벌처럼 느껴지기 까지 했다. 멍하게 있다가 결국 돈을 건네 주려던 순간 주변에 지나가던 여대생 2명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나를 보고 다가와 아이들을 쫓아주었다. 그 학생들은 시리아 난민들은 고마움을 전혀 모른다며, 아까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는 도와주려 하지 말고 단호히 거절하라고 나에게 거듭 이야기 했다. 분명 나에게 놓인 시리아 내전과 그 터키 대학생에게 놓인 시리아 내전의 무게와 이에 대한 입장은 달랐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와 그들이 부담하고 있는 책임 또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100%는 아니지만 그 친구들이 그렇게 당부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 사건 이후 남은 여행 기간 동안 그 친구들의 당부에 따라 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내는 것이 아니라 거절의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지금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너무나도 화끈거린다. 나는 과연 그 당부를 따랐어야만 했을까? 그게 내 책임의 무게였을까?

시리아의 내전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슬람국가(IS)가 불안한 시리아의 상황을 틈타 세력을 확장했고 내전에도 개입하여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시리아 내전이지만 리비아사태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가? 아마 내가 시리아의 난민 아이들을 마주하며 느꼈던 그 감정을, 그 벌을 지금 국제사회가 누군가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외면은 그 당시에는 아무런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와 경험을 통해 우리는 결국 외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 배우게 된다. 이 말이 지금 일어나는 상황들과 그 벌이 정당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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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러스 해를 뒤로한 멜리케, 나, 셀다> 


#다시 만난 또 다른 친구, 멜리케


우리는 추운 날 이스탄불에서 다시 한번 만났다. 정이 정말 많은 멜리케. 항상 따뜻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는 친구.  멜리케는 이스탄불에서 남쪽으로 꽤 떨어진 도시 ‘부르사(bursa)’ 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셀다를 통해 내가 이스탄불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르사에서 이스탄불로 단숨에 배를 타고 왔다. 오랜만에 보는 멜리케는 머리카락이 많이 짧아지고, 염색을 했지만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그 따뜻한 미소의 멜리케였다.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유스큐다르(Üsküdar) 에서 만나 거리를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Kurukahveci Yavuz Bey라 불리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에 몸을 따뜻하게 해줄 음료가 필요했던 터라, 주저 없이 계피가루가 뿌려진 살렙(salep)을 시켰다. 부드럽고 달콤한 살렙은 차이는 있지만 타락죽과 비슷한 맛이 났다. 꽤 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겨울날 야외에 앉아 마시는 살렙은 추위마저 잊게 만들었다. 우연히도 당시 멜리케와 셀다의 남자친구들이 군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던 터라, 두 친구 모두 그 그리움을 이야기 하느라 바빴다. 하하호호 떠들고 있던 중 인상 좋은 주인아저씨께서 웃으시며 피스타치오가 들어간 로쿰(Rokum)을 한 접시 가져다 주셨다. 씹히는 피스타치오가 매우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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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피가루가 뿌려진 살렙(우)와 피스타치오 로쿰(좌)> 


나는 결국 이동하는 길에 살렙과 로쿰을 잔뜩 사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 짐을 지고 아름다운 항구를 구경시켜준다는 친구들을 따라 카디코이(Kadıköy)로 가는 버스를 탔다. 도착해 바닷가에서 항구에 들어선 배들, 보스포러스 다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우리는 배가 고파져 터키식 곱창 샌드위치인 코코로쉬 (Kokoreç)를 파는 식당에 갔다. 사실 곱창의 질긴 식감이 싫어 곱창을 즐겨먹지 않았던 나인데 여행을 하며 마주치는 도시들에서 곱창을 먹을 기회가 자꾸 생겼다. 피렌체에서 먹은 곱창버거 이래로, 이번이 두번째 곱창체험이었다. 개인적으로 피렌체의 시장주변 에서 먹은 곱창버거는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나에게 매우면서도 곱창냄새가 강하게 느껴져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기에, 사실 터키에서도 곱창음식 먹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설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동그란 석쇠에 돌돌 말려 구워지는 곱창을 본 순간, 기름이 쪽 빠진 그 자태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역시 지중해의 음식, 터키 음식답게 토마토, 양파를 잘게 썰고 거기에 큐민, 오레가노와 같은 갖가지 향신료까지 아낌없이 넣은 샐러드가 함께 나왔는데, 향신료 덕택인지 또는 함께 먹는 아삭한 샐러드 덕분인지 기름이 잘 빠진 곱창은 전혀 느끼하거나 질기지 않고 담백하고 씹을수록 고소했다. 이미 배가 불렀지만 아쉬움이 남아 마지막 입가심으로 각종 향신료와 토마토로 맛을 낸 홍합 돌마(Midya dolma)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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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어가고 있는 곱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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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로쉬와 함께 나오는 샐러드(우)와 홍합을 넣은 돌마(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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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코이의 야외카페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 


배부르게 먹은 뒤 소화를 위해 걸어서 도착한 곳은 카페였다. 야외 자리에 앉아 차를 주문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친구들과 다음 해 목표를 공유했다. 모두가 남은 한 해를 무사히 마무리 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 할 수 있길 진심으로 빌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하늘을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달콤한 바클라바(Baklava), 달콤한 흑맥주.


토요일, 셀다의 수업이 없는 날이라 하루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갈라타 타워(Galata Kulesi)에 올라가 이스탄불을 내려다 보기로 했다. 갈라타타워로 가기 위해서 건너는 다리 (Galata Köprüsü) 위에는 바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로 매우 북적였다. 아침부터 북적임이 전해주는 생기와 에너지를 한껏 받아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을 지나 도착한 카라코이(karaköy)의 바클라바 최고 맛집은 바로 Karaköy Güllüoğlu였는데, 1820년에 문을 열었으니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이 있는 가게이다. 가게의 규모는 어마어마했고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과 바클라바로 가득 차 있었다. 피스타치오를 듬뿍 넣고 얇은 페스츄리를 겹겹이 쌓아 만든 고소한 바클라바에 아낌없이 더해진 시럽이 달콤한 맛을 더했다. 나는 그 중 몇 가지를 골라 홍차와 함께 맛을 봤는데 달콤한 바클라바와 씁쓸한 홍차의 궁합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피스타치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속 재료들을 사용했는데 그 중에는 호두를 가득 채운 것, 상큼한 오렌지를 넣은 것, 초콜렛을 넣어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극대화 한 것도 있었다. 피스타치오를 가지고 그들이 무엇을 만들어 냈는가! 나는 터키의 눈부신 업적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욕심 같아서는 몇 상자를 사서 한국으로 부치고 싶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초콜렛 피스타치오 바클라바의 맛은 나에게 오스트리아의 모짜르트 케익을 떠올리게 했다. 유럽에서 발견되는 피스타치오가 들어간 디저트 류, 과거 커피문화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터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 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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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köy Güllüoğlu에서 맛볼수 있는 바클라바와 디저트>


갈라타타워에 가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계단과 오르막 길을 올라가야 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한 세공품 가게에 들리게 되었는데, 구경한 제품들 중 한 캔들 홀더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 분파 중 하나인 신비주의, 수피 교도를 본 따서 만든 캔들 홀더였다. (수피교도들은 춤과 같은 신체적 활동과 고행을 통해 신과의 정신적인 교감을 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한 불빛을 중심으로 쉼 없이 돌아가는 수피장식을 보니 신과의 합일을 위해 끊임없이 춤추는 수피를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이미지가 매우 또렷했던 터라 이후 잔상이 내 머릿속에 진하게 남았다. 

우리는 다리가 아플 때쯤 타워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타워는 승강기를 이용해 올라갈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승강기가 없었다면 올라가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한 낮에 타워에서 내려다 보는 이스탄불은 아름다웠다. 보스포러스해는 과거에도 그러했듯 지금도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희미하게나마 과거 이스탄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살았던 이곳, 제2의 로마로 세계 역사 무대의 중심지였던 바로 이곳,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이슬람 시대의 이 곳을 말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살아가는 셀다라는 작은 역사를 바라보았다.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보면서 강하게 부는 바람에 새삼 그 높이를 느끼면서 동시에 역사의 보고에 내가 두발을 딛고 있음을 실감했는데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정말 짜릿했다.

 갈라타타워가 위치한 카라코이(karaköy)는 오스만 제국 말기에 서방 각국들이 오스만 술탄으로부터 받은 ‘영사특권’을 노리던 곳이었고, 그리하여 이곳에 거주하던 비무슬림 인구들은 면세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유럽인들에 의해 이곳에는 유럽산 제품이 팔리게 되었고 카페, 극장, 바, 식당, 오페라하우스, 제과점 등 서구식의 다양한 문화적 장소가 생기게 되었다. 실제로 이스티크랄 거리(İstiklâl Caddesi)를 걸으면서 나는 구시가지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조금 놀랐다. 매우 현대적인 거리로, 곳곳에서 심심찮게 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큰 음악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손에 와인이나 다른 술을 들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스티크랄 거리에서 셀다의 친구인 유수프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우리는 식당과 선술집으로 가득 찬 치첵 파사즈(Çiçek Pasajı)의 꼭대기에 있는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셀다와 유수프는 저녁을 먹으면서 끊임없이 정치얘기를 나누었는데, 터키의 민주주의가 어디로 가는가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고, 이슬람이 정치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라며 염려했다. 저녁을 다 먹은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갈라타타워로 향했다. 그리고 밤에도 여전히 빛나는 갈라타타워 아래서 흑맥주를 마셨다. 이스탄불에서 의 일상 중 가장 달콤한 하루였다.


# 아침을 깨우는 아잔


마지막 날 아침에도 역시 근처 이슬람사원에서 들려오는 아잔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덜 깬 눈으로 아침을 먹었는데, 다양한 치즈와 올리브, 빵과 홍차를 마셨다. 한국에 가면 이 올리브와 치즈가 정말 그리울 것 같아 꼭꼭 씹어 먹었다. 항상 마셨던 홍차, 바쁘고 긴 출근길 풍경, 평화로운 나날 가만히 앉아 지냈던 시간들, 친구들의 일상 속에서 함께 터키를 즐기고 느꼈던 순간들이 너무나도 그리워 질 것 같아 울컥했다. 지금 돌아보니 정말 그립다. 그리고 아직도 아잔을 들으며 맞이했던 그 아침이 생생하다. 

카디코이의 카페에서 멜리케, 셀다는 나에게 여름의 이스탄불도 꼭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년소망으로 나의 재방문을 빌어주었는데.. 이번 해는 그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가까운 미래에 꼭 그 소망을 꼭 실현하고 싶다. 신이 원하신다면. 인샬라. 과거를 간직한 채 계속해서 변화하는 도시 이스탄불, 나는 여름의 이스탄불, 앞으로의 이스탄불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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